근대미학의 성립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미술문화) 중에서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 중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무용, 시, 소설, 연극, 영화, 사진, 애니메이션, 비디오 아트... 이런 각기 다른 인간의 활동들을 우리는 예술이라는 하나의 개념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지요. 그런데 고대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예술 개념, 말, 체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은 고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죠. 물론 영화, 사진, 애니메이션, 비디오 아트, 컴퓨터 아트 같은 것은 없었지만요.
통상 예술이라고 번역되는 "art"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 "ars"에서 나왔고, "ars"는 희랍어 "techne"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techne"라는 말은 영어의 "techniqu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대 희랍인들이 사용했던 "techne"라는 말은 "기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테크네"가 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우선 한마디로 말하자면 "테크네"는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인간의 제작활동 일체"를 의미합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1) 테크네는 인간이 하는 활동입니다. 신 혹은 자연이 하는 활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2) 인간의 활동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테크네라고 불리는 활동은 무언가를 생산(produce) 혹은 제작(make)하는 활동입니다. (3) 테크네는 기술(skill) 혹은 솜씨에 의존하는 활동입니다. 특정한 테크네를 하려면 그것을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기술을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 테크네입니다. 또한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에게 가르칠 수 있겠죠. 이렇듯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여 학습과 교육이 가능한 것이 테크네입니다. (4) 테크네를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하기 위한 일반적인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의 체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체계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고서는 테크네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었던 테크네라는 활동에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활동, 그리고 학문(science)라고 부르는 활동도 포함되었습니다. 예컨대 목수의 기술, 의사의 기술, 장사꾼의 기술, 항해술, 웅변술 등이 모두 테크네라고 불리웠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술에 포함하는 모든 활동을 테크네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테크네에 속하는 예술은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시각예술로, 시, 음악, 무용, 연극 등은 테크네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테크네의 이러한 의미가 "art"라는 말에 그대로 이어지며, art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은 르네상스 시기까지 계속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은 예술 개념은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성립된 것입니다.
플라톤도 이와 같은 테크네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테크네를 우선 두종류로 분류했는데, 획득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획득적인 테크네는 자연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이용하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장사꾼이 돈벌이를 하는 기술은 여기에 속합니다. 장사꾼의 활동을 통해 이익이라는 것이 창출되지만 이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닙니다. 생산적인 테크네는 자연에는 없는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의 기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술은 모두 여기에 속하겠지요. 플라톤은 생산적 테크네를 다시 실제적 대상의 생산과 상(image)의 생산으로 나눕니다. 건축가가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대상을 생산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러나 화가가 집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실제 대상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인의 관념에서는 회화와 조각은 비슷한 부류의 활동으로 이해되었지만, 건축은 전혀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대체로 건축가들은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습니다. 건축은 실생활에 필수적인 유용한 기술이니까요. 이와 달리 고대 사회에서 화가나 조각가들은 보다 천한 계층의 사람들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테크네를 플라톤은 모방적 테크네라고 불렀습니다. 이미지 혹은 모방 (Mimesis)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원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칼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원래의 칼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칼의 속성 혹은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칼이 무엇입니까? 날카롭고 예리해서 무언가를 썰거나, 전쟁시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도구죠. 하지만 그림 속에 그려진 칼은 칼의 외양만 모방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모방적 테크네를 다시 진정한 유사성(eikon)의 모방과 외형적 유사성(phantasma)의 모방으로 구분합니다. 진정한 유사성의 모방이란 모델의 참된 크기, 비례, 색채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진적 사실주의(photographic realism)에 의해서나 가능하겠죠. 반면에 외형적 유사성의 모방은 사물이 보이는 방식만을 본뜨는 일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회화나 조각을 "모방적이다" 라고 비난조로 말했을 때, 이는 화가나 조각가가 바로 phantasma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였습니다. 플라톤의 견지에서 화가나 조각가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가나 조각가들은 사물이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방 혹은 재현(representation) 행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의도적인 왜곡을 해야만 오히려 원래의 모델과 더 유사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공화국>에서 플라톤은 화가가 목수의 침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느 한 시점에서 "보이는 대로" 모방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견지에서 화가의 그림은 목수의 설계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설계도는 비록 침대의 외형적 유사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침대의 현실적 구조를 기록하고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침대의 그림이 보여주는 침대의 닮음꼴은 환영적이어서, 실재는 물론 현실성조차도 잘못 모방합니다. 결국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나 조각은 기만적인 눈속임 혹은 지각적 환영(illusion) 제작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지 못하는 회화나 조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됩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난의 이면에는 그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이원론을 상정하고 있는바, 그는 세계의 구조를 이상계라고 할 수 있는 본체계와 현상계, 즉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현실세계로 이분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상계를 초월해 있는 이상계는 원형의 세계이고,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metaphysical) 세계입니다. 이곳은 미 그 자체 혹은 미의 이데아(Idea)가 존재하는 세계이며,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의 원형들(prototypes)이 거주하는 세계입니다. 이데아의 본성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순수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반면 현상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로,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가변적이며 순수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physical) 세계인 현상계는 한마디로 허망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사물들은 이상계의 이데아를 모방함으로써 존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현상계에는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같은 수많은 인간들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이데아 - '인간'의 이데아, 즉 인간의 보편적 형상(eidos) - 를 모방한 결과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서로 다른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고 불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상계의 사람들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고 맙니다. 그리고 살아있을 때에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늘상 변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데아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유지되는 추상적인 속성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이다, 인간은 두 눈과 하나의 코를 가졌다.." 등과 같은 인간의 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합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들의 세계가 보다 진정한(real) 세계라고 보았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상계에 대해서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말했듯이 현실의 인간은 인간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인물을 그린 그림을 생각해 봅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바라볼 때, 그림 속의 인물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상계의 사물을 다시 한번 모방한 결과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방의 모방이요,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며, 형상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지라도, 칼의 속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림 속의 칼은 무 하나도 벨 수가 없습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는 현실계보다 한단계 아래에 있고, 실재(reality), 즉 이데아의 세계보다는 두단계나 떨어져 있어, 존재론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는 존재가 되고 있지요.
앞서 언급하기를, 테크네에는 시각예술, 즉 회화, 조각, 건축은 속해 있었지만, 시, 음악, 무용, 연극 등은 속해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각예술에 속하지 않는 시, 음악, 무용, 연극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발생 초기에 시, 음악, 무용, 연극은 상호 미분화된 활동으로서, 고대인들이 "코레이아" (choreia)라고 부른 일종의 제식(ritual) 행사의 일환으로 나타났습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원시 민족의 집단적 제사 행위를 떠올리면 됩니다. 주술사를 중심으로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원시적 행위는 제식과 축제(fest)가 분리되지 않은 집단 행사입니다.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이처럼 제식과 축제가 결합된 "코레이아"와 같은 행위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코레이아와 같은 종교적-예술적 활동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접수하기 위해 신과 교감할 수 있는 신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고대 희랍인들은 "엔토우지아스모스"(enthousiasmos)라고 했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말은 영어의 "enthusiasm"의 어원입니다. 다시말해 신적인 상태란 다름아닌 열광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제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제로부터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사제처럼 신에 열광된 상태에 빠져야 합니다. 코레이아는 사람들을 그러한 상태로 인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이러한 발생학적 배경에서 시인의 활동을 "예언력" 혹은 "영감"(inspiration) 같은 종교적 상태와 관련시켜 파악했습니다.
플라톤 역시 당시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 즉 뮤즈(Muses) 여신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로 보았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일종의 광기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도 "신들렸다" 혹은 "신명난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상태를 일컫는 것인데, 고대 희랍인들은 시인의 활동의 원동력을 그러한 상태에서 찾았습니다. 즉, 시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적인 힘 - 그것이 예언력이건, 영감이건, 직관이건 간에 - 에 의존한다는 얘기지요. 또한 고대의 제식이 그러했듯이, 시인이 낭송하는 시를 듣는 - 혹은 연극을 보는 - 관객들 또한 신에 사로잡힘 당하는 열광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다 할 때, 시(poetry)가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지식에 대해서 두 가지의 다소 상반된 시각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1) 신적인 능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시는 인간적인 활동을 통해 경험적으로 축적되는 지식 - 예컨대, 테크네 -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정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우리는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지닌 정신성은 인간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얘기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보다 우월하니까... (2) 그런데 시가 지닌 비이성적인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 또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플라톤입니다. 시인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시를 읊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시를 청종하는 관객들 역시 시인과 비슷하게 정신이 나간(out of mind)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지닌, 사람을 사로잡고(possess) 홀리게 하는(enchant) 힘은 마땅히 이성적이어야 할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격정을 불러 일으켜서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은 무익할뿐더러 해악한 존재라고 판단, "시인추방론"을 역설합니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대인들은 화가의 활동과 시인의 활동을 동류의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가의 활동은 테크네, 즉 art라고 생각한 반면, 시인의 활동은 테크네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가 테크네의 중요한 속성들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시는 물질적 의미에서 제작(making)도 아니요, 규칙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화가 모방의 소산이라면, 시는 창조력의 소산이며, 회화가 기술 혹은 솜씨에 의존한다면, 시는 영감에 의존합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이 두가지 종류의 활동을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플라톤에 의해 회화와 시는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그림자의 그림자, 모방의 모방이라고 평하면서 존재론적 서열에서 최하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의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비난하였습니다. 한편 시인이 전달하는 지식은 이성적인 소산이 아니므로, 플라톤은 그것을 참된 지식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신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순에 차 있고, 비합리적이라고 하면서 플라톤은 인식론적 입장에서 시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술에 대한 평가가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플라톤이 예술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찌보면, 플라톤은 시가 가진 "매혹하는"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금지를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회화를 "기만적 눈속임"이라고 했을 때에 플라톤은 이미지가 가진 환영적 속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즉, 회화가 세계의 모방이라면, 하나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원래 모델과 외양이 닮은 유사물, 즉 이미지입니다. 이미지의 본성은 그것이 본질을 결여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술모방론은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예술작품과 세계 간에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 예컨대 "개"라는 단어 - 문자 - 는 개라는 대상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고, 세계내의 대상으로서 개를 지시하지만, 개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실체는 결여하고 있습니다. 모방론의 입장에서 바라본 회화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죠. 일찍이 플라톤은 그러한 회화, 즉 이미지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변화의 귀결로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관이 성립되었지만, 신고전주의 예술관이 변모하는 이같은 과정에서 형식적 교과로서의 근대적 형태의 미학이론이 성립하게 되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이 상상에 관련된 활동이며, 미가 감정에 관련된 가치인 것으로 자각되는 과정을 통해 예술과 미의 문제는 과거처럼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에 지엽적으로 부수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영역을 이루는 특수한 문제로 부각됨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로크의 경험주의적 철학에 기초하여 미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학적 논의가 앞서 미론의 항목에서 언급한 취미론이고, 라이프니츠-볼프의 합리주의적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시)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학적 논의가 A. G. 바움가르텐이 주장하는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서의 '에스테티카'(aesthetica)이다. 근본적으로 취미론은 2가지 신념에 입각하고 있다. 하나는 "미는 대상의 성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흄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의 취미론자들은 미의 주관성을 확신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가 주관적인 즐거움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객관적 기준, 곧 취미의 기준이 있으리라는 신념이다. 이러한 2가지 신념하에서 취미론자들은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인 미를 감각적 성질의 문제로 환원시켜 미의 공식을 확립하려 했다.
이에 비해 바움가르텐은 예술을 이성이 아닌 감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을 통해 획득되는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만이 세계에 대한 유일한 인식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수정·보완하여, 명석하지만 혼연한 관념의 획득도 이 세계를 파악하는 또다른 방식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발전시킴으로써 바움가르텐은 후자의 관념을 획득하는 능력을 이성에 대해 감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명하기보다는 불분명하게 세계를 파악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고급 인식능력인 이성에 비해 감성을 '저급한 인식능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감성은 여전히 사유능력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의사 이성'(analogi rationis)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사유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으로서 논리학이 있듯이 비록 저급하지만 사유능력인 감성 역시 어떤 원리에 따라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원리에 대한 학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에스테티카라는 학명을 세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을 이러한 사유능력인 감성에 의한 일종의 인식활동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감성 자체의 원리로부터 연역된 규칙을 준수해야 하며, 시학·회화론·음악론 등에서 언급되는 제규칙들이 바로 그러한 규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미는 감성을 통해 파악된 세계의 완전성(vollkommenheit)으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미를 객관적인 완전성의 개념에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예술을 비록 저급하지만 과학과 같은 인식의 한 방식으로 보고 철저한 규칙준수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움가르텐은 신고전주의 예술관을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성 대신 데카르트에게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또다른 인식능력으로서의 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의 활동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미학이론은 지극히 근대적인 계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18세기는 미의 공식이라든가 예술의 규칙과 같은 고전적인 요소가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를 통해 전개되는 다양한 미학이론의 노선을 예비해놓고 있는 징후가 미나 예술의 개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영국의 취미론과 독일의 에스테티카와 같은 근대적인 형태의 미학적 기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대미학의 최종적인 귀결로서 18세기말의 칸트라는 거목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의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은 영국의 취미론이나 바움가르텐의 에스테티카를 통해 논의된 미학적 문제들을 수용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그 문제들을 자기 비판철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해석하여 미의 예술이 진정으로 독자적인 고유영역을 이루고 있음을 보증해줌으로써 미학이라는 학문이 문자 그대로 하나의 독립된 자율적인 교과로 발전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했다. 따라서 칸트를 분수령으로 그에게 귀결되는 18세기의 여러 미학적 논의들을 근대미학이라 규정하고, 그러한 근대미학적 논의들 속에서 어떤 특수한 사상을 새로운 방법론의 입장에서 더욱 철저히 밀고나간 그후의 다양한 미학이론들을 현대미학이라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현대미학을 형이상학적 미론의 전통을 계승한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 취미론에서의 경험주의적 전통을 보다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19세기말 이후의 예술학(science of art), 그리고 1950년대 언어분석의 방법이 미학에 도입되면서 새롭게 대두된 비평철학(philosophy of criticism)이라는 3가지 경향으로 압축된다.
현대미학의 제 전개
예술철학
예술의 본질을 묻는 미학이론으로서 칸트의 〈판단력비판〉 후반부에 나오는 예술의 개념, 곧 미적 이념을 표현하는 천재의 소산으로서 예술의 개념을 관념론의 중요한 계기로 수용·발전시킬 때 형이상학적인 예술철학이 성립한다. 즉 인간의 정신에 세계를 구성하는 힘을 부여하고, 유일한 실재는 그러한 정신적 실체로서의 절대적 이념일 뿐이라는 관념론적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술이야말로 그 고유한 방식으로 이념을 파악 또는 구현하는 정신활동으로서 관념론의 기본주장을 실증해주는 적합한 사례로 수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술은 이념을 파악하여 진리를 획득하는 정신활동의 하나로서 형이상학의 체계 속에 수용되고 있다.
F.W. 셸링 같은 철학자에 있어서 가장 고차적인 진리획득의 기관으로서의 예술은 곧 철학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예술철학이라는 학명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의 예술철학이 유일한 예술철학은 아니다. 상상적 직관보다는 이념을 파악하는 방식으로서 개념을 우위에 둘 때 G.W.F. 헤겔의 예술철학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셸링과 헤겔을 출발점으로 이념을 말하는 형이상학의 특성에 따라 온갖 형태의 예술철학이 전개되어왔는데, 흔히 신관념론자로 불리는 B. 크로체, R.G. 콜링우드와 신칸트주의자로 불리는 E. 카시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술철학이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고유한 인식의 한 방식이라는 기본가정에 입각하여 발전된 교과인 한, 예술철학은 레닌의 유물론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예술을 사회적 실재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예컨대 G.V. 플레하노프나 G. 루카치 등에게서도 강력히 구성되고 있다. 또한 존재론의 입장에서 예술을 존재(Sein) 해명의 수단으로 보는 H. 하이데거의 시론 및 예술을 세계와의 1차적 접촉을 통한 근원적 의미의 개시로 보는 현상학적 입장의 M. 메를로 퐁티 등은 모두 예술철학적 경향의 미학이론을 개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이념이나 절대자, 실재나 존재 등과 같은 실체들이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역시 예술을 일종의 특수한 의미의 활동으로 보고, 예술작품을 고유한 의미의 담지체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철학의 기초를 마련하려는 기도도 있다. 실용주의 입장의 J. 듀이, 기호론적 입장의 S.K. 랑어, 그리고 새로운 지각철학의 입장에서 '회화적 의미'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는 올드리치, 예술을 세계파악의 상징체계의 일환으로 보는 유명론적 입장의 N. 굿먼 등도 예술을 고유한 의미의 담지자로 보는 예술철학적 입장의 미학자들이다. 이처럼 예술을 인식의 한 방식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예술철학은 고전적 전통을 잇는 바움가르텐의 에스테티카 이념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예술학
예술학의 성립에는 전에 볼 수 없는 몇 가지 이론적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19세기 중엽 이후 형이상학 자체 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자기 변모와 함께 대두한 자연주의적 철학 경향은 미와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 역시 자연주의적 설명을 허용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각종 예술철학을 위기로 이끌고 있다. C. 다윈의 진화론과 H. 스펜서의 유희론은 예술과 미의 발생에 관한 이러한 설명을 촉진시켰으며, G. 페히너의 '밑으로부터의 미학'(Aesthetik von unten)은 미와 예술과 같은 특수한 심리현상에 대해서 역시 심리학과 같은 과학이 접근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다. 다음으로 미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K. 휘들러나 K. 랑게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어 예술은 미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같은 주장의 대두와 함께 예술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방법이 도입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이상, 심리학의 계속적인 발전과 사회학·인류학·인종학 및 역사(특히 미술사) 등에서 성취한 발전들이 예술의 문제에 계속 개입하게 되었고, 따라서 마지막으로 근대적인 예술의 체제와 개념에 심한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미학의 경향은 미라는 획일적인 규범미학이 아니라 기술미학의 성격을 띠면서 예술에 대한 구체적·경험적 연구가 진행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가 계속될수록 종래의 미학이론, 특히 형이상학적 예술철학을 떠받치고 있던 기본가정들은 점차 허위로 밝혀졌고,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예술에 대한 여러 과학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그들 자료를 체계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일반법칙을 찾고자 하는 기술적 경험과학으로서의 미학, 곧 예술학이 나타났다. 물론 예술학에서도 학자에 따라 체계구성의 원리와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시도가 일어났다. 대표자로는 E. 우티츠, M. 데수아, F. 카인츠, T. 먼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종래의 예술철학이 지니고 있는 경험적 허구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예술학은 경험주의적인 취미론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미학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학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예술학을 수립하려는 예술학자들은 그 작업이 예술의 이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하건 불분명하건간에 예술의 개념을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학은 그 개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예술학은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하는 예술철학을 전제로 하거나 그와 제휴하여 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의 개념이 요청된다 하더라도 예술학 그 자신이 비판하고 나선 형이상학적인 이론으로부터 그것을 빌려올 수는 없다. 허구라고 해서 앞문에서 차버린 것을 필요 때문에 뒷문으로 슬그머니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동시에 예술철학적 입장을 취해 예술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예술철학으로부터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바로 학으로서의 예술학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비평철학
예술학의 정립에 필요한 타당한 예술의 개념을 예술철학이 제공하기 힘들다고 한다면 예술철학이 자신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탐구할 대상을 제공해주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소신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가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소산 모두가 예술작품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예술에 대해 훌륭한 취미와 풍부한 조예를 지니고 있는 사람, 즉 어느 대상을 예술로 가치화하고 평가할 수 있는 비평가의 존재가 개입하게 된다. 과학으로서의 예술학은 비평가를 통해 자기의 연구대상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비평가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또다른 문제로서 올바른 비평의 기준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철학은 바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리처즈를 비롯한 신비평의 실제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 방법을 배경으로 발전된 미학의 새로운 경향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올바른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이론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전통적으로 취미론의 문맥인 미적 태도론의 기본가정을 받아들여 미적 태도를 취할 때의 지각대상을 올바른 비평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스톨니츠의 이론이다. 한편 미적이라 규정되는 그러한 특수한 태도는 없으며, 따라서 실제 비평가의 비평적 진술을 분석함으로써 고유한 비평적 진술을 가려내고, 그러한 진술의 대상으로서의 미적 대상을 비평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M.C. 비어즐리의 이론도 있다. 그러므로 스톨니츠는 미적 태도에 입각한 미적 자각을, 비어드즐리는 미적 대상이 지니고 있는 대상의 특수한 성질을 비평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평철학은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전통적 미학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본질론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언어분석의 입장으로부터 발전된 지극히 새로운 경향이다. 이러한 분석은 18세기 영국 취미론의 최종적인 귀결로서, '미'가 정의될 수 없다는 식의 미에 대한 스튜어트의 분석과 일치하고 있는 미학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철학은 예술이 정의될 수 없는 열려진 개념임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냄으로써 예술의 정의를 기초로 한 체계적인 예술철학이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예술철학의 근본문제였던 예술의 정의 문제가 기피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예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비평가들에게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난문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미학의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미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철학에서 형이상학의 전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