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미학1 - 예술론을 중심으로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미술문화) 중에서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 중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무용, 시, 소설, 연극, 영화, 사진, 애니메이션, 비디오 아트... 이런 각기 다른 인간의 활동들을 우리는 예술이라는 하나의 개념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지요. 그런데 고대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예술 개념, 말, 체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은 고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죠. 물론 영화, 사진, 애니메이션, 비디오 아트, 컴퓨터 아트 같은 것은 없었지만요.

통상 예술이라고 번역되는 "art"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 "ars"에서 나왔고, "ars"는 희랍어 "techne"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techne"라는 말은 영어의 "techniqu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대 희랍인들이 사용했던 "techne"라는 말은 "기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테크네"가 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우선 한마디로 말하자면 "테크네"는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인간의 제작활동 일체"를 의미합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1) 테크네는 인간이 하는 활동입니다. 신 혹은 자연이 하는 활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2) 인간의 활동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테크네라고 불리는 활동은 무언가를 생산(produce) 혹은 제작(make)하는 활동입니다. (3) 테크네는 기술(skill) 혹은 솜씨에 의존하는 활동입니다. 특정한 테크네를 하려면 그것을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기술을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 테크네입니다. 또한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에게 가르칠 수 있겠죠. 이렇듯 경험과 기억에 의존하여 학습과 교육이 가능한 것이 테크네입니다. (4) 테크네를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하기 위한 일반적인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의 체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체계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고서는 테크네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었던 테크네라는 활동에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활동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기술이라고 부르는 활동, 그리고 학문(science)라고 부르는 활동도 포함되었습니다. 예컨대 목수의 기술, 의사의 기술, 장사꾼의 기술, 항해술, 웅변술 등이 모두 테크네라고 불리웠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술에 포함하는 모든 활동을 테크네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테크네에 속하는 예술은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시각예술로, 시, 음악, 무용, 연극 등은 테크네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테크네의 이러한 의미가 "art"라는 말에 그대로 이어지며, art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은 르네상스 시기까지 계속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은 예술 개념은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성립된 것입니다.

플라톤도 이와 같은 테크네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테크네를 우선 두종류로 분류했는데, 획득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획득적인 테크네는 자연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이용하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장사꾼이 돈벌이를 하는 기술은 여기에 속합니다. 장사꾼의 활동을 통해 이익이라는 것이 창출되지만 이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닙니다. 생산적인 테크네는 자연에는 없는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의 기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술은 모두 여기에 속하겠지요. 플라톤은 생산적 테크네를 다시 실제적 대상의 생산과 상(image)의 생산으로 나눕니다. 건축가가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대상을 생산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러나 화가가 집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실제 대상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인의 관념에서는 회화와 조각은 비슷한 부류의 활동으로 이해되었지만, 건축은 전혀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대체로 건축가들은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습니다. 건축은 실생활에 필수적인 유용한 기술이니까요. 이와 달리 고대 사회에서 화가나 조각가들은 보다 천한 계층의 사람들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테크네를 플라톤은 모방적 테크네라고 불렀습니다. 이미지 혹은 모방 (Mimesis)에서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원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칼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원래의 칼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칼의 속성 혹은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칼이 무엇입니까? 날카롭고 예리해서 무언가를 썰거나, 전쟁시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도구죠. 하지만 그림 속에 그려진 칼은 칼의 외양만 모방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모방적 테크네를 다시 진정한 유사성(eikon)의 모방과 외형적 유사성(phantasma)의 모방으로 구분합니다. 진정한 유사성의 모방이란 모델의 참된 크기, 비례, 색채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진적 사실주의(photographic realism)에 의해서나 가능하겠죠. 반면에 외형적 유사성의 모방은 사물이 보이는 방식만을 본뜨는 일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회화나 조각을 "모방적이다" 라고 비난조로 말했을 때, 이는 화가나 조각가가 바로 phantasma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였습니다. 플라톤의 견지에서 화가나 조각가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가나 조각가들은 사물이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방 혹은 재현(representation) 행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의도적인 왜곡을 해야만 오히려 원래의 모델과 더 유사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공화국>에서 플라톤은 화가가 목수의 침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느 한 시점에서 "보이는 대로" 모방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견지에서 화가의 그림은 목수의 설계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설계도는 비록 침대의 외형적 유사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침대의 현실적 구조를 기록하고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침대의 그림이 보여주는 침대의 닮음꼴은 환영적이어서, 실재는 물론 현실성조차도 잘못 모방합니다. 결국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나 조각은 기만적인 눈속임 혹은 지각적 환영(illusion) 제작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지 못하는 회화나 조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됩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난의 이면에는 그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이원론을 상정하고 있는바, 그는 세계의 구조를 이상계라고 할 수 있는 본체계와 현상계, 즉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현실세계로 이분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상계를 초월해 있는 이상계는 원형의 세계이고,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metaphysical) 세계입니다. 이곳은 미 그 자체 혹은 미의 이데아(Idea)가 존재하는 세계이며,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의 원형들(prototypes)이 거주하는 세계입니다. 이데아의 본성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순수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반면 현상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로,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가변적이며 순수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physical) 세계인 현상계는 한마디로 허망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사물들은 이상계의 이데아를 모방함으로써 존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현상계에는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같은 수많은 인간들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이데아 - '인간'의 이데아, 즉 인간의 보편적 형상(eidos) - 를 모방한 결과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서로 다른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고 불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상계의 사람들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고 맙니다. 그리고 살아있을 때에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늘상 변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데아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유지되는 추상적인 속성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이다, 인간은 두 눈과 하나의 코를 가졌다.." 등과 같은 인간의 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합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들의 세계가 보다 진정한(real) 세계라고 보았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상계에 대해서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말했듯이 현실의 인간은 인간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인물을 그린 그림을 생각해 봅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바라볼 때, 그림 속의 인물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상계의 사물을 다시 한번 모방한 결과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방의 모방이요,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며, 형상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지라도, 칼의 속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림 속의 칼은 무 하나도 벨 수가 없습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는 현실계보다 한단계 아래에 있고, 실재(reality), 즉 이데아의 세계보다는 두단계나 떨어져 있어, 존재론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는 존재가 되고 있지요.

앞서 언급하기를, 테크네에는 시각예술, 즉 회화, 조각, 건축은 속해 있었지만, 시, 음악, 무용, 연극 등은 속해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각예술에 속하지 않는 시, 음악, 무용, 연극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발생 초기에 시, 음악, 무용, 연극은 상호 미분화된 활동으로서, 고대인들이 "코레이아" (choreia)라고 부른 일종의 제식(ritual) 행사의 일환으로 나타났습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원시 민족의 집단적 제사 행위를 떠올리면 됩니다. 주술사를 중심으로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원시적 행위는 제식과 축제(fest)가 분리되지 않은 집단 행사입니다.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이처럼 제식과 축제가 결합된 "코레이아"와 같은 행위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코레이아와 같은 종교적-예술적 활동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접수하기 위해 신과 교감할 수 있는 신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고대 희랍인들은 "엔토우지아스모스"(enthousiasmos)라고 했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말은 영어의 "enthusiasm"의 어원입니다. 다시말해 신적인 상태란 다름아닌 열광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제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제로부터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사제처럼 신에 열광된 상태에 빠져야 합니다. 코레이아는 사람들을 그러한 상태로 인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이러한 발생학적 배경에서 시인의 활동을 "예언력" 혹은 "영감"(inspiration) 같은 종교적 상태와 관련시켜 파악했습니다.

플라톤 역시 당시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따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 즉 뮤즈(Muses) 여신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로 보았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일종의 광기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도 "신들렸다" 혹은 "신명난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상태를 일컫는 것인데, 고대 희랍인들은 시인의 활동의 원동력을 그러한 상태에서 찾았습니다. 즉, 시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적인 힘 - 그것이 예언력이건, 영감이건, 직관이건 간에 - 에 의존한다는 얘기지요. 또한 고대의 제식이 그러했듯이, 시인이 낭송하는 시를 듣는 - 혹은 연극을 보는 - 관객들 또한 신에 사로잡힘 당하는 열광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다 할 때, 시(poetry)가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지식에 대해서 두 가지의 다소 상반된 시각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1) 신적인 능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시는 인간적인 활동을 통해 경험적으로 축적되는 지식 - 예컨대, 테크네 -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정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우리는 합리적인 혹은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지닌 정신성은 인간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얘기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보다 우월하니까... (2) 그런데 시가 지닌 비이성적인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 또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플라톤입니다. 시인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시를 읊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시를 청종하는 관객들 역시 시인과 비슷하게 정신이 나간(out of mind)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지닌, 사람을 사로잡고(possess) 홀리게 하는(enchant) 힘은 마땅히 이성적이어야 할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격정을 불러 일으켜서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은 무익할뿐더러 해악한 존재라고 판단, "시인추방론"을 역설합니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대인들은 화가의 활동과 시인의 활동을 동류의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가의 활동은 테크네, 즉 art라고 생각한 반면, 시인의 활동은 테크네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가 테크네의 중요한 속성들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시는 물질적 의미에서 제작(making)도 아니요, 규칙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화가 모방의 소산이라면, 시는 창조력의 소산이며, 회화가 기술 혹은 솜씨에 의존한다면, 시는 영감에 의존합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이 두가지 종류의 활동을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플라톤에 의해 회화와 시는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그림자의 그림자, 모방의 모방이라고 평하면서 존재론적 서열에서 최하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의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비난하였습니다. 한편 시인이 전달하는 지식은 이성적인 소산이 아니므로, 플라톤은 그것을 참된 지식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신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순에 차 있고, 비합리적이라고 하면서 플라톤은 인식론적 입장에서 시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술에 대한 평가가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플라톤이 예술의 본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찌보면, 플라톤은 시가 가진 "매혹하는"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금지를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회화를 "기만적 눈속임"이라고 했을 때에 플라톤은 이미지가 가진 환영적 속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즉, 회화가 세계의 모방이라면, 하나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원래 모델과 외양이 닮은 유사물, 즉 이미지입니다. 이미지의 본성은 그것이 본질을 결여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술모방론은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예술작품과 세계 간에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 예컨대 "개"라는 단어 - 문자 - 는 개라는 대상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고, 세계내의 대상으로서 개를 지시하지만, 개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실체는 결여하고 있습니다. 모방론의 입장에서 바라본 회화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죠. 일찍이 플라톤은 그러한 회화, 즉 이미지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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