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유다는 제자들의 회계를 맡고 있었으며 예수와 동료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가 마리아를 나무란 것은 마리아에 대한 책망이라기보다 스승에 대한 원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가장 소중한 인성으로 가르치는 예수가 현실적인 정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그는 불만이었다.
유다는 직접 재정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 모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리아를 나무란 말은 스승에게 은근히 유대 민족 전체가 로마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뼈 있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질책이 아니었다면 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충정 어린 충고를 하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배반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제자의 마음을 읽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례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서 12:7?】


예수는 유다가 왜 자신을 배반하는지 안다.
민족에 대한 그의 사랑도 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를 설득시키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
사랑의 화신이 되려는 자신의 결단은 오랜 기도 끝에 얻어진 결론이며 이미 결단이 이루어진 마당에 제자의 투정을 꾸짖고 싶지 않다.
300데나리온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싶다면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제자들이 돈을 마련해서 자선을 베풀 수 있다.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마리아의 집을 나선 예수는 나귀에 올라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반시간 거리이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냈고,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집 앞에 모여 예수의 뒤를 따를 차비를 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떼를 크게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를 보려고 왔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유대 사람이 떨어져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12: 9?1】


가야바는 부활한 나사로를 살해하려고 모의했지만 송사리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대어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국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속속 귀국하여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를 향해 “호산나!” 하고 외쳤다.


이튿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그를 맞으러 나가서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요한복음서 12: 12?3】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의 환호를 예언자 스가랴의 도래할 왕에 대한 말씀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서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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