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는 젊었을 때 여자들에게 성경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클레멘트에게는 상당한 지식이 있었지만 진취적이지 못했으므로 신학을 진전시키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절충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나누어 준 이성의 빛에 비유했으며 복음서에 나타난 이성의 빛을 깨닫는 데 철학이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영혼은 그리스 철학을 통해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이런 신앙의 터전 위에 진리는 지식의 체계로서 세워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철학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겼는데 이 같은 사상을 제자 오리게네스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소극적인 방법이었지만 오리게네스에 의해서 삼위일체론과 일반적 신학이 제시되었다.
유스티누스와 클레멘트는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가 인류의 역사에 로고스의 씨앗을 심었다는 신학을 창조했다.
두 사람은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로고스를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은 구약성경과 이교철학에서도 로고스의 일부가 나타나지만 로고스가 전모를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오리게네스에 의해 보존되었으며 그는 로고스-그리스도론(Logos-Christology)을 창조했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던 시기에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자 오리게네스는 이듬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의 고향이었으며 부모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버지는 202년 교회가 탄압받을 때 순교했다.
그때 오리게네스는 17살이었는데 참수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아버지를 따라 가려다가 제재당했다.
고아가 된 그는 남동생 여섯 명을 돌보아야 했다.
오리게네스는 18살 때 교리문답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자와 교사가 될 소질을 보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정이 생기자 그는 직장을 버리고 책도 모두 팔아치우고 남은 여생 50여 년을 신학에 전념했다.
그는 마루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고기를 먹지 않았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겉옷은 한 벌 뿐이었고, 신발은 아예 없었다.
그의 독서량은 대단했는데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히브리어 실력이 우수해서 원전들을 유대인 학자들이 이해하듯이 했다고 한다.
그는 잃어버린 시편을 발견하여 그 중 4편을 소장했으며, 여리고에서는 항아리에 들어 있던 한 편을 몸소 발굴하기도 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연구했으며 많은 분량의 주석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하지 않는다.
제롬은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모두 읽어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가 얼마나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저서에는 주석이 많은 데다 그 내용도 깊이가 있어 그의 신학의 깊이를 헤아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는 성서적 신학을 확립했는데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놓치지 않고 해석하려는, 숨은 보화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철학을 배척하면서 그는 성경에 관한 지식만으로도 진리의 첩경을 삼을 수 있다고 했다.
그에 의해서 신학은 지성적으로 진전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오리게네스가 어렸을 적부터 성경을 연구했다며 말했다.
오리게네스는 거룩한 말씀을 그저 문학적인 내용으로 읽는 것에 만족해하지 않고 좀더 유익한 점을 추구했으며, 어린 나이에 깊은 사색에 빠졌고, 성경의 영감에 관한 궁극적인 의미를 캐물어 아버지를 곤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플로티누스와 함께 스승 암모니오스 삭코스(Ammonios Sakkos)에게서 수학했는데 스승을 통해 초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급격히 발전한 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
이 사상은 고대 플라톤 사상의 연속이지만 고전적 플라톤주의를 순수이론보다는 종교성이 주요 요소가 된 포괄적 범세계주의 사상체계로 변형시킨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된 이데아세계는 단순한 관념의 세계만이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온 영적 또는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사상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통해서 부각되었다.
유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를 수준 높은 철학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가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다신교를 극복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동방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였다.
철학자 외에도 오리게네스는 언어학자, 비평가, 주석가, 교의학자, 변증론자, 논쟁자였다.
저서는 방대한 양에 이르지만 일부만이 현존하는데 정확한 성경의 원문을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헥사플라 Hexapla』를 썼다.
이것은 구약성경 원문에 대한 6개의 번역본을 원문 옆에 병기한 컬럼형식으로 쓴 것이다.
『헥사플라』는 극히 적은 부분만 현존하며 그의 설교집과 주석집도 부분만 현존한다.
제롬은 그가 무려 2000편을 저술했다고 한다.
저서 대부분 현존하지 않는 이유는 가톨릭이 그를 553년 제5차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젊었을 때 여자들에게 성경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되자 사역에 방해가 되는 육체의 요소를 제거했다.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태복음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