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오류를 범하는 까닭이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오리게네스는 평생 성경의 영감에 관한 궁극적 의미를 캐는 일에 전념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이는 영지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심오한 진리란 처음에는 비밀스러운 것일지라도 오래 숙고하면 그것이 계시하는 영감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라는 신념에 회의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회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참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원리들에 관하여 On First Principles』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아침과 저녁에 태양, 달, 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농사꾼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에덴의 동쪽에 낙원을 만들었다”고 믿을 어리석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나님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닐었다”고 했을 때 나는 이것이 실재와 유사하면서도 실재의 사건이 아닌 어떤 신비를 시사하는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관해 기록된 성경을 가르칠 때 문자의 뜻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야만적이고 불의한 사람들이 믿지 않을 때는” 명확한 상징의 의미를 찾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이 사전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담과 원죄에 관한 이야기에서 아담은 히브리어로 남자를 뜻하며, 아담과 관련해서 언급한 말에는 모세가 사람의 속성에 관해 시사한 점이 있는데 이 점을 아는 사람은 성경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1, 언어학적(somatic, body의 뜻이다) 해석으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직접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누구에게나 이해가 가능하다.
2, 도덕적(psychic) 해석으로 성경을 오늘날의 정황에서 해석하는 존재론적인 방법이다.
3, 정신적(pneumatic) 해석으로 도덕적이 아닌 신비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방법인데 소수의 지성인들에게만 이해가 가능할 뿐이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에 신비적인 뜻으로만 기록된 구절이 있음을 밝히고 이런 구절은 은유적 방법을 통해 그 이면에 내재한 숨은 뜻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적인 방법으로 언어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두고 수준 낮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구절 이면에 내재한 숨은 뜻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 예로 그리스 철학자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면 구절 이면에 내재한 숨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교리는 그리스인의 첫 걸음마에 해당하며, 둘째 걸음은 자율적 방법과 이성적 방법으로 성경의 숨은 뜻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자율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한 점은 훗날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강조된다.
오리게네스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오류를 범하는 까닭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므로 고집이 세고 무지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가 구세주임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가 구주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점을 꼽았다.
고집이 세고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가 포로에게 해방을 알려 주거나 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참 도성을 건립하지 않았으며,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의 병거와 군마를 없애지 않아 양젖과 꿀을 먹지 못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집 세고 무식한 사람들은 예수가 이미 행위로 나타내어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가 구주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까닭도 영감에 관한 궁극적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에 불가해하고 신비스러운 내용이 적혀 있음을 시인하면서 롯이 두 딸과 섹스하여 아이를 낳은 것, 아브라함이 아내를 둘 거느린 것, 두 딸이 아버지 야곱의 아내가 되었고 두 여종이 야곱의 자식을 낳은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이런 내용들을 불가해하며 신비스러웠던 시기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언 1:6)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복음서의 경우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일지라도 이면에 내재한 그리스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을 인용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참조 이사야 40:13-14)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함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