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타나시우스도 유세비우스와 유사한 논리를 전개했는데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므로 비록 그분이 육체의 형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광휘와 지혜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현존함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그는 성경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한 구절은 많지만 요한의 한 마디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3, 1:14 )
요한의 주장과 같은 내용을 바울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독생자를 지상으로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또한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올 것을 선지자들이 예고했다며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이사야의 말을 지적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사람의 형체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된 것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형체로 왔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건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형체로 온 것과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된 것의 상이한 점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으므로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인 줄 알았다는 것을 다음의 성경 구절을 통해 증명하려 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마태복음 8:2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모독했으니까)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노라 (요한복음 10:33)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되었지만 여전히 신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9)
그리스도는 인류가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고통 속에 희생시켰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녔으므로 신성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었다고 했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모독한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 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0:36-38)
아타나시우스는 인성을 지닌 예수의 육체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영을 구별했는데 예수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팔을 뻗어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킨 것은 인성을 지닌 예수였지만 그녀의 병을 치유한 것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예로 들면서 나사로에게 말한 것은 인성을 지닌 예수였지만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는 이런 사건들이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시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성육신된 예수는 보통 사람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며 구세주라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생애를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으로 인식하면서 만일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성육신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의 행위로부터 결코 자유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 해석한 바울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 (공동번역)
아타나시우스는 제2의 아담인 예수는 하나님의 영을 내재했기 때문에 죽음마저도 분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사람들은 그분으로 인해 더 이상 아담의 원죄에 의한 죽음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담이 상실한 영생을 그리스도가 회복했음을 강조하면서 아담이 지은 죄 값으로 인류는 저주받고 죽어야 마땅하나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인류의 죄가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것이며 반면 인류는 영생을 누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역설했다.
그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그리고 그리스도와 죄의 관계는 베드로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전서 4:1)
그는 예수가 몹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육신은 고통을 당했을지라도 신성은 고통당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예수 생애의 의미는 속죄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한 데 있기에 예수 자신은 무죄하다고 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한 I서 3:5)
결론적으로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온전한 인성을 강조하면서도 인성이 신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고난당하고 높임 받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영혼과 육신을 취한 것과 그리하여 신성과 인성 두 속성이 항구적 결합을 이룬 것을 그리스도가 하나의 인격을 구성하게 된 사유로 꼽았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 인한 결합에서 진정한 주체가 되었으며 육신을 자기의 계시와 사역의 기관으로 삼았다.
그는 이런 결합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참여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한 주체의 사역임을 역설하며 그리스도가 고난에 참여했지만 고난 받은 것은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종속론을 배척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아버지에게서 유출된 영적인 존재로서 아버지보다 낮은 곳에 거하는 분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항상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발생시키는 분이기 때문에 아들도 이 같은 원리에서 발생되는 분이라는 것이 그의 신학의 요지이다.
그는 아버지는 신적 본체이고 아들은 하나님의 사역 중에 나타나는 외적인 행위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들은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설사 그분이 발생된 존재임을 의미하는 어떤 존재라고 할지라도 신성에서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분이다.
아들과 아버지는 두 분이 공유하는 독특한 본성과 하나의 신성이라는 동일성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신격을 갖춘 위격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특이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서 조건이 지워진 양위간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활동의 근원이 되는 분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외형적인 활동 중에 나타난 하나님이었다.
이때 성령도 함께 나타나서 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였으므로 성령도 신성 안에서 동등한 분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신격화 될 수 있으며 만일 성령이 하나님 본체에 속한 분이 아니라면 갱신은 순수한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외형적 활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활동하는 것이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