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릴은 그리스도가 성육신되었을 때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시릴은 그리스도가 성육신되었을 때 이성적인 예수의 영혼도 그리스도에 융합되어 일체를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이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었다(요한 1:14)고 말했을 때 예수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융합되었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가 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리스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육신을 지녔지만 육신을 지니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리스도였으며, 주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속성은 한결같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육신을 지녔다는 것은 육신과 일체가 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사람이 둘이 아닌 하나의 실체가 된다는 논리이다.
일체에 대한 그의 해석은 비록 사람이 이질적인 물질인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인성이라는 한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치이다.
그리고 그 육신이 예수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릴은 예수가 우리처럼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 두고자 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시릴은 성육신을 인성과 본질의 완전함으로 이해했으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 인성의 완전함을 박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육신되어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예수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며 또한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시릴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가 사망한 적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바울의 “성결한 영으로는 (거룩한 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로마서 1:3-4)라는 말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옹호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전서 2:8)


결론적으로 시릴은 아타나시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감독 그레고리와 마찬가지로 성육신된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리스도-하나님이 이성을 포함한 비인격적인 사람의 본성을 취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희생한 것이 없었다는 논리를 진전시키며 “하나님에게는 변화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구속자로서의 활동이 변치 않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성과 인성의 인격적 결합으로서의 그리스도론, 즉 그리스도가 성육신되기 전에는 신성과 인성이 두 속성이었지만 성육신된 후에는 오로지 한 속성인 신성이면서 동시에 인성인 신적-인간적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이런 점에서 단성론자들은 시릴이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믿었다.
시릴은 그리스도는 수난을 받을 수 없는 분이지만 성육신을 통해서 자기의 것이 된 인간적 속성으로는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시릴의 논리의 요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성과 인성이 단일체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교체될 수도 혼합될 수도 없었다.
신성이 인성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성이 각기 자기의 속성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와 시릴의 논쟁이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지자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두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 431년 두 사람을 공직에서 파면했다.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기로 하고 433년에 타협안으로 하나의 신조를 만들어 선포한 후 휴전을 공식화했다.
신조에는 안디옥 학파의 주장에 반대되는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신조는 안디옥 학파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시릴이 서명해 추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시릴은 복직되었으며 444년에 사망했다.


얼마 후 수도사 유티케스(Eutyches)가 그리스도론의 논쟁 무대에 등장했다.
유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찬동자로서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수도원 원장이었다.
그는 안디옥 학파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성육신된 후로는 오로지 한 본성만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는 다르다는 것이 유티케스의 주장이었다.
그의 이론에는 모호한 요소가 많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리스도가 두 속성을 지닌 분이 아니라 한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대감독 플라비안(Flavian)이 주관한 448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파면당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교황 레오 1세(Leo I)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종교회의가 이듬해 에베소에서 소집되었으며 유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도움으로 본회의를 통해 본래의 직분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공한의 형식으로 플라비안에게 전달되었고 회의석상에서는 논의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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