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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당정치 실록 2권
연시중 지음 / 지와사랑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국민이해와 전혀 무관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부산 정치파동(발췌개헌), 4사5입 개헌파동, 1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2·4 국가보안법 파동을 3대 정치파동이라고 한다.
모두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해서 유발된 사건들이다.
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고, 국민의 이해와 하등의 관계가 없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헌정사가 굴절되고 비극이 연출되었다.
특정인의 한 정파를 위해 제도가 창안되었고 또 바뀐 것이 40년 우리나라 헌정사의 특징인 것이다.
2·4파동의 여파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원외에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혁당, 노농당 등 재야세력이 연합하여 민권옹호총연맹을 결성한 후 장기투쟁의 태세를 갖추었고, 원내에서도 91명의 의원들이 민주구국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민권옹호총연맹과 유기적 연결을 맺으면서 대여투쟁의 강경책을 세웠다.
이에 호응하여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서 민중데모가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이 빈번하여 사회적 불안이 가증되어 갔다.
국회는 간신히 소집되었으나 여야 간 다른 의제를 주장하여 공전을 거듭할 뿐 정국타개의 방안을 모색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2·4파동에 대한 공개사과, 책임자 인책, 보안법 중 독소 조항 삭제, 지자법 환원을 요구했고, 자유당은 의사방해와 폭력행사를 배제한다는 명목으로 엉뚱하게 국회법 개정을 내세웠다.
여야는 총무회담을 통해 의제 절충을 협상했으나, 서로 당략에 집착되어 타결안이 나올 수 없었다.
이같이 정국이 교착되자 이의 타개를 위해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4파동 문제를 초월하여 대국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개헌론이 대두된 것이다.
1959년 1월 19일 조병옥 민주당 대표가 중앙의료원에 입원 중이던 이기붕과 회담을 갖고 보수 세력의 단합을 강조하며 1년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유혈참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기붕과 조병옥 두 사람의 합의로만은 불가능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기붕과 조병옥은 공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시킬 것을 합의하고,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기붕과 조병옥의 회담이 진전됨에 따라 자유당의 이재학, 박만원, 조순과 민주당의 유진산, 김의택, 윤제술 의원들이 막후 교섭을 진행시켜 정국의 일대 전환과 정치세력의 대유동이 전망되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가 힘을 모을 경우 충분히 개헌을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민주당 신파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구파에 대해 자유당과의 막후교섭의 저의와 경위를 추궁하고 있었던 점에서 개헌 추진은 해당 행위이며, 대여투쟁의 약화를 자초하는 행위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구파는 내각책임제는 민주당의 기본 정책인데 자유당이 진심으로 제의해 온다면 거부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응수했다.
이 문제로 양파 참모진 사이의 시비에서 한 층 위로 올라가 조병옥 장면 사이에 의견이 상충되었다.
장면은 “이기붕과 조병옥의 회담은 당론의 테두리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당론과 방침은 최고위원회와 간부회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데 반해, 조병옥은 “당대표의 자유재량권으로 회담을 가진 것이며, 또 이미 최고위원회에서 양해가 되었다”고 맞섰다.
이같이 2·4파동의 여파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파급되어 민주당의 파쟁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유당은 2·4파동에 대한 국민의 지탄을 피할 수 있었던 이득을 본 셈이었다.
이렇듯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파별 이해에만 급급하여 대여 작전에서 행동통일을 하지 못했고, 자유당은 계속 이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자유당은 그렇지 않아도 여태까지 추진해 오던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벽에 부딪치자 소위 정·부통령 동일 티켓제 개헌을 구상하고 구파 의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사실 야당 의원들은 오랜 파쟁에 지쳐서 당에 대한 애착심이 식어가고 있어 자유당이 유혹의 손길이 뻗치기에 좋은 실정이었다.
오비이락인지는 몰라도 구철회, 조정훈, 송영주, 김주묵, 홍순희, 허윤수, 유승준, 김삭, 김규만, 박창화 의원이 탈당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 내분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민주당에 머물고 싶지 않다고 탈당 이유를 밝혔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호헌 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 외에도 탈당은 유보하고 있으나 자유당과 밀약한 의원들의 수는 모를 일이었다.
구파는 당황했다.
이들은 속출하는 탈당을 막기 위해 만일 자유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공명선거를 보장할 수 있는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개헌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신파는 개헌 동조자들의 징계론을 주장하여 두 파의 알력은 격화되었다.
민주당은 대여투쟁보다 집안싸움의 진화작업이 더 급했다.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모든 것을 좀더 연구하자”는 결론을 내리며 여당과의 협상을 지연시켰다.
때마침 항간에 탈당 의원들에 대한 금전거래 풍문이 퍼지자 자유당과 밀약했던 야당 의원들의 행동이 위축되었고, 여당은 기대하던 개헌선 확보가 어렵게 되어 개헌 열기는 식어갔다.
2·4파동 후 개헌을 둘러싼 대여자세 문제로 내분의 진통을 겪은 민주당은 그 여진이 끊기지 않은 채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임하게 되어 창당 이래 최대의 파란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