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석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 금강석에 해당하는 아다마스adamas를 ‘무엇으로도 당할 것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플리니우스이다(37. 47 ).
피지올로구스가 소개한 일화의 뿌리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활동하였던 세노크라테스Xenokrates의 기록으로, 이후에 성 히에로니무스가 아모스 서 주해를 쓰면서 이를 다시 인용하기도 하였다.
금강석이 염소의 피에 닿으면 용해된다는 피지올로구스의 설명도 세노크라테스에게서 가져왔다.
금강석이나 홍옥석을 밤에만 채광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고전 문헌에서 자주 등장한다.
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 황제가 쓴 귀금속의 상징에 관한 기록을 비교하면 좋다.
1 I 고린토 2: 15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라틴 성서의 “Spiritalis autem iudicat omnia et ipse a nemine iudicatur”는 “영에 속한 이는 모두를 심판하지만 그 자신은 누구에 의해서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2 요한 8: 46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왜 나를 믿지 않느냐?”
3 즈가리야 6: 12
공동번역에서는 “이 사람을 보라. 그 이름은 새싹이니”라고 옮겨졌다.
그러나 라틴 성서의 “ecce vir oriens nomen eius”에서 ‘ vir oriens’는 ‘떠오르는 사람’ 또는 ‘동방의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보라. 그의 이름은 떠오르는 사람이니” 혹은 “보라. 그의 이름은 동방의 사람이니”라고 옮겨야 한다.
루터 성서에서 “Siehe, es ist ein Mann, der hei쬽 Spro㎕구?“보라, 그는 사내요, 이름은 새싹이니”라고 옮긴 것은 지나친 의역이다.
본문에서는 금강석이 해가 떠오르는 동방국에서 난다는 사실과 연관지었다.
4 민수기 24: 17
이 눈에 한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러나 당장 있을 일은 아니다.
그 모습이 환히 보이는구나.
그러나 눈앞에 다가 온 일은 아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5 마태오 4: 16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이사야 9: 2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피지올로구스가 금강석의 특성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민수기 24: 17과 마태 4: 16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탄생의 비밀과 연관 지은 것은 성서의 본디 의미맥락과 상관없이 금강석의 상징해석을 종교적으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른바 ‘첸토cento 기법’으로 불리는 ‘인용문 이어붙이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첸토 이후 고대의 문학적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6 돌의 두 가지 성질을 음미함으로써 신앙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유비적 해결책으로 제안되었다.
7 아모스 7: 8
공동번역에는 “나 이제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드리웠다”로 옮겨졌다.
라틴 성서의 “ Ecce ego ponam trullam in medio populi mei Israhel”에서 ‘trullam’은 아모스의 대답 ‘ trullam cementarii’를 반복한 말로 ‘담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납추’를 뜻한다.
루터 성서에는 ‘ 납끈Bleischnur ’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금강석 혹은 아다마스를 드리웠다는 본문의 내용은 피지올로구스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문헌 전거를 인용하였거나 오역일 가능성이 크다.
8 마르코 10: 35-38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20: 20-22와 비교할 수 있다.
9 히브리서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