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Car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실시된 몇 차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동차를 구매할 때 선택기준으로서 색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격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구매자들에게 제조사와 모델, 성능, 그 밖의 다른 품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의 색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이러한 조사결과에 놀랐지만 1950년대 초에는 이것을 거의 무시했다.
그 후 소비자의 수요에 떠밀려, 색에 관한 방침을 약간 수정하여 대중의 요구와 변덕스러운 유행을 고려해야 했다.
마지못해서라고 하기엔 좀 지나치지만, 그럼에도 제조사들의 이런 방침 전환은 언제나 망설임 속에서 행해졌다.
기술자들에게 차체의 색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제조공정 중에서 도장(塗裝)은 마지막 공정이다.
판매 전략에서 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알아야만 한다) 것은 ‘영업사원’뿐이었다.
그런데 자동차산업에서 영업은 중요한 영역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그것을 유감스럽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에도 새 차를 구입할 때 여전히 색을 고르는 데 어려운 이유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지만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물론 영업사원은 다양하고 풍부한 색 견본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어떤 색은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든가, 어떤 색은 초과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든가, 어떤 색은 그가 선택한 모델에는 없다든가, 그 옵션에 그 색은 어울리지 않는다든가이다.
따라서 이 색 저 색을 그렇게 빼고 나면 재고에 있는 고작 3~4종의 색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음에 드는 색이 아니라 싫은 색을 제외해가면서 가장 덜 싫어하는 색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마음에 드는 색을 선택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제외해가는 방식 또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참는 선택방식은 옷을 살 때와 매우 비슷한 문제다.)
차의 색을 실제 자신의 기호대로 선택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아직 이론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사회학자와 사회심리학자(!)가 지역, 국가, 시대, 사회 환경에 따른 자동차 색에 대한 선호도 통계조사에서 이끌어낸 교묘한 결론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수치들은 실제 대중들의 선호도보다 제조사의 상상력 부족, 한심한 미적 감각, 도덕적 복고성향, 기술혁신에 대한 유치한 욕망을 표현할 뿐이다.

2) 그렇다 하더라도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에 관계없이 우리가 가진 차(차뿐 아니라 그 밖의 물건도)의 색을 보고 우리를 판단하고, 계급과 서열이 정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색과 우리 본래의 취향이 일치하지도 않으며, 우리들 스스로가 나타내고 싶어 하는 이미지와도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차 색의 선택은 일회성 사건에 불과하다.
눈에 튀는 화려한 색의 차를 탄 사람은 상식을 벗어난 도발적인 운전자가 되는 것이다.
빨간 차를 탄 사람은 위험하고 난폭한 사람이고, 검정색 차의 소유주는 엄격한 성격이거나 공적인 인물이 된다.
흰색 차, 베이지색 차를 타는 사람들은 여성적이며, 녹색 차를 타는 사람은 더 젊고, 밤색, 겨자색, 주황색 차를 타는 사람은 미적 감각이 한심한 사람이 된다.
반면 회색, 파랑 계열의 차를 타는 사람은 절도 있고 우아한 인물로 보인다.
적어도 1992년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독일, 이탈리아, 미국에서는 차체의 색에 부여하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
프랑스에서조차 현재 감성적으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이 20년 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며, 5년이나 10년 후에는 진부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색채의 상징적 의미는 어느 시대에나 문화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그 때문에 이 의미는 역전되기도 하고 파기되기도 하며, 새로운 가치체계가 출현하는 일도 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나 지방에서 존경받는 명사가 분홍색이나 주홍색 차를 운전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 가치체계를 뛰어넘는 사치를 즐길 만한 명예와 존경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3)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관리규정과 계급에 따라서 미리 정해진 색의 상표를 운전자의 등에 붙이게(행운인 경우는 드물지만) 된다.
이 상표를 떼어내기는 어렵다.
나에게도 또렷한 기억이 있다.
예를 들면 60년대 초, 몇몇 보험회사는 빨간색 차의 소유주에게 특별 보험료를 부과하고 있었다.
차가 빨간색인 이유가 아니라 빨간색일 경우 소유주가 거의 대부분 젊고 평균보다 더 많은 사고를 일으킨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 세대 정도 이전일 뿐인데도 이러한 행태는 오늘날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로 생각된다.
그러한 일은 없었다고 보험회사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랬다.

나 자신도 빨간색 차에 관한 그와 같은 경험을 특별한 추억으로 가지고 있다.
80년대 초 중고차를 사려던 무렵 흔해빠진 보통 차를(물론 소거법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매우 싼 가격의 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차의 본체가 발랄한 빨간색이었다.
판매원은 나에게 이 모델은 중년이나 품행이 방정한 사람, 스피드나 성능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데 막상 그 사람은 이 색을 싫어하고, 반대로 젊은 사람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이 색은 좋아하겠지만, 모델이 ‘한물간’ 것인데다 엔진도 ‘털털거리는’ 힘없는 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은 그 차는 아주 낮은 가격이 아니면 아무도 사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해서 내 차지가 되었다.

4) 이러한 관찰을 통해, 차체의 색에 대한 사회문화적 조사의 한계를 인식한 이후, 19세기 말에 출현한 자동차 색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차가 탄생하고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대부분 차의 색은 검은색이나 회색, 또는 하얀색이나 크림색이었다.
‘색다운 색’이 없었던 이유는 도료 화학과 결부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도덕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자 프로테스탄티즘 가치관의 부산물이기도 하다는 이유에 의해, 자동차는 ― 기타 많은 제품과 마찬가지로 ― 색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었다.
즉 신중하면서도 결백하고 정직하며 존경할 만한 시민과 고결한 기독교도의 이름에 부끄럼 없는 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여기서 헨리 포드를 생각해보자.
이 자동차왕국의 창시자는 엄격한 청교도주의의 신조에 따라서 검정색 차밖에 팔 수 없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중엽에 걸쳐서 이 경향은 역전된다. 검정색과 흰색의 차는 적어지고, ‘컬러’ 자동차가 많아졌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부터 복고주의에 의해 수수한 어두운 색, 특히 회색이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얼마나 지속될까?

이 긴 사이클 안에 훨씬 짧은 사이클이 있는데, 이것은 지리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기에도 또 유행과 속물주의에 의한 특유의 어떤 시계추운동이 작동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검은 차를 타면 ‘세련된 멋쟁이’는 빨간색이나 노란색 차를 타게 된다.
또 모든 사람이 화려한 색의 차를 타면 첨단의 첨단은 회색 차를 탄다.
20세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차에 한정되지 않고, 패션으로부터 일상의 자질구레한 물건, 책이나 잡지의 표지, 담뱃갑에 이르기까지 이 시계추운동의 리듬은 점점 빨라져 색을 둘러싸고 구축되어 온 가치체계가 전면적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 「옷」, 「담배」,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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