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형해의 관조
에스키모 무당 후보자는 새로운 신비적 기관들과 같은 보조영신補助靈神을 찾으러 떠나기 전 혹독한 입문의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체험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후보자는 자신을 형해形骸로 관조觀照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경지를 향해 길고도 험한 육체적 고난과 정상적 명상瞑想의 단계段階를 거쳐야 합니다.
이에 대해 어느 무당은 말했습니다.
“어느 무당도 왜,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당은 초자연적인 것에서 나온 듯한 자기 두뇌의 힘으로, 마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자기 몸에서 살과 피를 분리시키고 오직 뼈만 남게 할 수 있다. 그런 뒤 무당은 자기 뼈마디마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자기 뼈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서도 무당은 인간의 언어를 써서는 안 된다. 오로지 스승으로부터 배운 특수하고 신성한 무당의 언어로만 이 뼈마디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죽으면 썩을 덧없는 살과 피에서 해방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봄으로써, 무당은 무당의 신성한 언어로서 자신을 성별하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태양과 풍상에 가장 오래 견딜 수 있는 육신의 바로 이 부분에 걸고 위대한 무업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보조영신을 접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 의례의 성패에 좌우하므로 입문의례入門儀禮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한 이 중요한 명상중의 수련은 묘하게도 시베리아 무당의 접신몽接神夢을 상기시킵니다.
차이가 있다면 시베리아 무당의 경우 조상무祖上巫나 신비적인 존재에 의한 수술의 결과로 형해상태가 되지만, 에스키모의 경우 이 수술은 정신적입니다.
에스키모의 경우는 정신집중이라는 개인적인 노력과 금욕생활을 통해 이런 형해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이런 신비적인 환상상태의 본질적인 요소가 육탈肉脫된 존재가 되고 육탈된 뼈에 차례를 매기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에스키모 무당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이런 환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시베리아 무당은 신비적인 존재로부터 택함을 입어 수동적으로 이런 해체상태를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례는 형해상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인간 조건의 초월, 이로서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렵민狩獵民과 유목민遊牧民의 정신적 지평에서 뼈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의 원천입니다. 한 인간이 형해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원초적인 삶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에 해당합니다.
즉 갱생, 신비적인 재생의 완성인 것입니다.
불교적 혹은 『탄트라 Tantra』적 중앙아시아의 명상체계瞑想體系 안에서 형해상태로 환원된다는 것은 금욕적이며 형이상학적 가치를 지닙니다.
『탄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을 넓히다’라는 뜻입니다.
경전은 『베다 Veda』 이후 7세기경에 나왔으며 신화와 전설을 백과사전식으로 담았습니다.
형이상학적 가치란 시간의 덧없음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 실체의 관조를 통해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는 것, 이로서 모든 행위가 무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관조가 기독교의 신비주의에도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이런 사실은 고대인의 최초의 의식적 깨달음으로써 도달한 궁극적인 것이 하나도 변함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합니다.
내용에 있어 이런 종교적 체험이 다른 종교적 체험과는 다르지만, 관조적 체험 자체는 동일합니다.
속의 경계와 개인적인 존재의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의지, 초월적인 전망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자기 전 존재의 영적 재생을 획득하기 위한 원초적인 생명으로의 재몰입을 통해서이든 육신이라는 환상에서의 해탈을 통해서이든 이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둘 다 진실이자 생명인 정신적 실존實存의 원천源泉을 발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