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것으로 기대



아인슈타인은 전기와 자기 그리고 중력과 양자역학을 함께 묶어서 우주에 대해 더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찾아내기 위한 외로운 탐색을 계속했다.
그는 일반상대성의 중력장 방정식을 확장해서 전자기장도 함께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는 그런 통일이론에서 양자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1918년 플랑크의 60회 생일축하연에서 “양자이론을 전기동력학 그리고 역학과 함께 하나의 논리적 체계로 통일하는 일에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축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플랑크에게 그 일을 요청했다.

증기선을 타고 아시아를 순방하는 동안 그는 새 논문을 다듬었고, 1923년 2월 이집트에 도착한 직후에 발표를 위해서 논문을 베를린에 있는 플랑크에게 보냈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중력장과 전자기장을 하나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기자에게 “이 이론은 영국 천문학자의 이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라고 말해 에딩턴의 공로를 인정했다.

그해에 발간된 여러 편의 후속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목표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양자이론의 불확정성과 확률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23년에 발표한 논문 “장이론이 양자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해줄 것인가”는 전자기장과 중력장이론이 어떻게 초기 조건과 결합된 편미분 방정식partial differential equation을 통해서 인과적 해답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편미분 방정식은 수학에서 여러 개의 독립변수로 구성된 함수와 그 함수의 편미분으로 연관된 방정식으로 소리나 열의 전파과정, 전자기학, 유체역학, 양자역학 등 많은 역학계에 관련된 예가 많다.

아인슈타인은 2년 만에 그런 접근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새로운 방법은 전자기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중력법칙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식적 표현을 찾아낸 뒤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 첫 번째 근사로 얻어질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물리학보다는 수학에 더 의존했다.
그의 논문은 1929년 1월 30일에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타임』과 인터뷰했고, 『타임』은 그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는데, 그가 표지에 등장한 다섯 차례 중 첫 번째였다.
프로이센 과학원은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1천 부나 발행했다.
그의 논문은 1월 30일에 공개된 뒤 곧바로 매진되었고, 과학원은 3천 부를 더 인쇄해야 했다.
그의 논문을 유리창에 붙여두었던 런던의 어느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꾼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난해한 방정식 33개가 들어있는 복잡한 수학 논문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코네티컷의 웨슬리 대학은 도서관 소장용으로 아인슈타인이 손으로 쓴 원고를 상당한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물리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팬이었던 에딩턴은 의문을 표했다.
실망한 사람들 중에는 볼프강 파울리도 있었다.
파울리는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주장이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배반했으며 물리학적 실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수학적 형식주의에 의존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순수 수학자로 전향했다고 비난했다.

아인슈타인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론을 포기했다.
그러나 탐색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아인슈타인의 제안 중에서 어느 것도 성공적인 통일장이론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사실 새로운 입자와 힘들이 발견되면서 물리학은 훨씬 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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