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둘째아들 에두아르트




에두아르트는 학업에 적응했지만 그의 신경 문제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열광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했고, 특히 쇼팽을 좋아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강렬했다.
철학과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마구 쏟아냈다.
아인슈타인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냉정하게 반응했다.

에두아르트는 취리히 대학에 진학해 의학을 공부했고,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침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두었고, 스스로 자기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나 자신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아버지를 가지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고 했다.
몇 달 후에 그는 더욱 불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지적인 일로 시간을 채우는 사람들은 병들고, 신경질적이며, 때로는 완전히 바보 같은 자식 예를 들면 아버지와 나를 낳는다.”

훗날 그의 편지는 더 복잡해졌다.
자신이 권위를 경멸한 죄 때문에 운명은 자신을 권위로 만들었다는 아버지의 유명한 한탄을 분석한 경우가 그러했다.
에두아르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그것은, 당신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굽히는 대신 싸우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신년에 빈에서 베를린으로 온 프로이트를 만났다.
당시 일흔 살이던 프로이트는 입에 암이 생겼고, 한쪽 귀는 멀었지만 두 사람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자신들의 연구 분야가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프로이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아인슈타인은 내가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만큼 심리학을 이해한다”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아들을 만나거나 치료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으며, 심리분석에 감동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의식을 파고드는 것이 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다리는 100여 개의 서로 다른 근육에 의해서 통제된다. 우리의 다리를 분석해서 각 근육의 기능과 그것들이 작용하는 순서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걷는 것에 도움이 될까?”라고 했다.
그는 또 “나는 분석되지 않은 어둠의 상태로 남아있고 싶다”고 선언했다.

대학에 다닌 동안 에두아르트도 연상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 특징은 가족의 내력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고통스런 결론에 이르게 되자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더 잚은 장난감에서 재미를 찾아보라고 제안했다.
직장을 찾아보라는 제안도 했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천재도 실업으로 낙심했었다. 인생은 자전거타기와 같은 거란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단다”라고 했다.

에두아르트는 그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수업을 빼먹고 방에 틀어박혀 있기 시작했다.
그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보살핌과 관심은 더 늘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930년 10월에 에두아르트를 방문해서 마리치와 함께 그의 침체된 기분을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함께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두아르트는 계속해서 더 어두운 곳으로 빠져들었다.
아인슈타인이 떠난 직후에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겠다고 위협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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