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점술가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1930년 12월에 시작된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미국 방문은 첫 번째 방문과는 다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번에는 대중의 열광이나 야단법석은 없을 것이었다.
대신 그는 연구원으로 두 달 동안 칼텍Caltech(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을 방문하기도 되어 있었다.
그의 여행을 준비한 관리들은 그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독일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홍보를 품위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온 것이 알려지자 매일 강연 제안과 수상식 초청을 비롯한 십여 통의 전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그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그와 그의 수학계산기 발터 마이어는 선원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위층 선실에 숨어서 통일장이론을 수정했다. 
 그의 여행일기에 따르면 50여 명의 기자와 50여 명의 사진기자들이 독일 영사와 그의 뚱뚱한 조수를 동반하고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질문을 했고, 나의 시시한 농담 같은 답변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네 번째 차원을 평범한 말로 정의해달라는 요청에 아인슈타인은 “점술가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상대성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까?
“짤막하게 정의하려면 사흘이 걸릴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독일의 텅 빈 뱃속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조건이 개선되기만 하면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인물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타임』지는 그 주에 모자를 쓰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의 아내 역할에 들떠있는 활기찬 엘자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잡지는 “수학자 아인슈타인이 은행 계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재정 문제를 챙기고, 여행 계획을 마련해야만 했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잡지 기자에게 “내가 그런 모든 일을 해야만 그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내 인생의 전부이다. 그는 그럴 가치가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 부인이라는 것이 매우 기쁘다”라고 했다.
그녀가 스스로 맡은 임무는 남편의 사인에 1달러, 사진에 5달러를 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장부를 작성해서 모은 돈을 아이들을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중심가 있는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1만5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유대교 축제일인 하누카Hanukkah(Chanukah 혹은 Chanukkah라고도 한다)를 기념했고, 자동차로 차이나타운을 돌아보고, 『뉴욕 타임스』 편집위원들과 점심을 먹고, 선풍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예리차의 <카르멘>을 들으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도착해서 환영을 받았으며, 지미 워커 시장으로부터 시청 열쇠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으로부터 “정신의 지배적 제왕”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막 완성된 2,100석 규모의 중앙 홀을 갖춘 거대한 리버사이드 교회도 방문했다.
침례교회였지만 서쪽 현관 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여 명의 사상가들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전신상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유명한 선임목사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 현관에서 아인슈타인과 엘자를 마중을 나와 안내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정원에 있는 임마누엘 칸트의 스테인드클라스 창문 앞에 서서 감탄을 한 후 자신의 동상에 대해서 물었다.
“이 모든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 내가 유일한 생존자입니까?”
포스딕 박사는 함께 있던 기자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중량감으로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 교수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생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조심해야겠습니다”라고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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