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마음속에는 극단적 평화주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탄 기차는 1931년 3월 1일 아침에 누욕 시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16시간 동안 아인슈타인에 대한 열광이 극에 달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저항자연맹(WRL)의 회원 400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배로 갔다.
그는 무도장에서 연설했다.
“평화 시에 평화주의 조직의 회원들이 감옥에 갈 각오로 정부에 반대하여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가장 마음이 굳고 의연한 사람들만이 반대할 전쟁 중에는 그런 노력이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광적으로 폭발했다. 너무 흥분한 평화주의자들은 달려 나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옷을 만졌다.

오후에 아인슈타인은 월도프 호텔로 인도되었다.
그는 복잡하게 뒤엉킨 방에서 헬렌 켈러와 여러 언론인을 비롯한 많은 손님들을 만났다.
그날 저녁 그는 이미 매진된 시온주의 모금만찬에서 연설한 후 자정 직전에 배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하루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많은 젊은 평화주의자들이 “영원히 전쟁 반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반겼다.
훗날 그들은 청년평화연맹을 결성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들에게 “더욱 본격적인 평화주의 운동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1920년대에 아인슈타인의 마음속에는 극단적인 평화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쉰 살이 되면서 물리학의 선두에서 물러나던 그는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적어도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가 집권할 때까지는 군비축소와 전쟁반대가 그의 주된 목표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졌으나 미국이 참여하기를 거부한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이 선택한 신중한 접근방법을 거부했다.
연맹은 완전한 군비축소를 요구하는 대신 교전과 군비경쟁의 적정한 규칙을 정하려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었다.
1928년 1월에 독가스무기 제한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연맹의 군비축소위원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그런 미봉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전쟁을 통제하기 위한 규틱과 제한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게임이 아닙니다. 그래서 게임에서처럼 규칙에 따라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전쟁 그 자체에 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국민들은 군복무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전쟁 당국과 가장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WRI)이 이끄는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28년 11월에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 런던 지부에 “모든 종류의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국제운동이 이 시대의 가장 유망한 발전 중 하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반전운동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해인 1932년에 절정이 이르렀다.
그 해에 국제연맹과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서 조직된 일반 군축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소설가 친구이고 동료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은 “아인슈타인은 고하가 분야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경향이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고려하면 군축은 환상이고, 평화주의의 희망은 아인슈타인이 가끔씩 던지는 말처럼 순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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