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신의 개념에 대한 믿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는 순진한 사람의 종교성과는 상당히 다른 특별한 종류의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턴의 추기경 윌리엄 헨리 오코넬은 “나는 아인슈타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런 의문과 함께 공간에 대한 애매한 회의의 결과는 무신론의 무시무시한 망령을 감추고 있는 가면이다”라고 했다.
뉴욕의 정통 유대인 지도자 허버트 S. 골드스타인 랍비는 아인슈타인에게 신을 믿느냐고 전보로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전보로 보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가 말한 신을 신봉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흥미를 느꼈고, 그가 현대 사상에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영혼과 육체를 두 개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았다. 일부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스피노자가 그런 믿음을 가진 이유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사회에서 쫓겨났고, 덤으로 가톨릭교회에서도 비난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뉴욕 브롱스의 어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코넬 추기경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사람들의 운명과 행동에 관심을 가진 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영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만족해했다. 그 흔적이 창조의 영광에서 나타나고, 일상적인 존재와는 씨름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신의 개념은 유럽이나 미국 모두의 훌륭한 전통 중 일부였다. 



아인슈타인은 쉰 살이 될 무렵부터 여러 글, 인터뷰, 편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유대 전통과 어느 정도 다른 의미에서 신, 즉 상당히 비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신의 자연신교적 개념에 대한 믿음을 좀더 분명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중력장 방정식의 아름다움을 포용하거나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거부할 때도 우주의 질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50회 생일 직후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드러낸 인터뷰를 했다. 기독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까지 받았냐는 질문에 그는 “어린 시절에 나는 성경과 탈무드 모두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번쩍이는 인물에 매혹되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실제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매력이 모든 단어에서 고동칩니다. 그런 삶에는 어떤 신화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신에 대한 유대인 개념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결정론자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교리를 거부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불멸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닙니다. 내게는 한 번의 삶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응답했다.
뉴욕에서 일요학교 6학년에 다니는 어린 소녀는 조금 다른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과학자도 기도를 하나요?”라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소녀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말했다. “과학적 연구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아이디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들의 행동에도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사건들이 기도자, 즉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전달한 소망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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