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보도를 보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인슈타인을 태운 원양 정기선 웨스트모어랜드 호가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33년 10월 17일이었다.
비가 내리던 23번가 항구에는 자신이 직접 키운 난초를 가지로 온 유명한 변호사이며 친구인 새뮤얼 운터마이어가 이끄는 환영위원회는 물론 그와 함께 환영행진을 할 응원단이 아인슈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측근들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연구소 소장 에이브러햄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을 언론으로부터 차단하는 일에 몰두했다.
플렉스너는 두 사람의 연구소 이사를 태운 예인선을 보내 웨스트모어랜드 호에서 검역을 마친 아인슈타인 일행을 몰래 데리고 나오도록 했다.
그는 “성명을 발표하지도 말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인터뷰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도 보냈다.

프린스턴의 피코크 인에 투숙한 아인슈타인은 파이프를 피우면서 신문판매대로 가서 저녁신문을 샀다.
그는 자신의 행방에 대한 보도를 보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는 볼티모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서 아이스크림콘을 샀다.
거스름돈을 주던 여종업원은 “이 일은 제 수첩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연구소의 임시 본부인 유니버시티 홀 구석에 있는 사무실이 주어졌다.
연구소에는 19명의 학자들이 있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던 그는 어떤 집기가 필요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책상이나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종이와 연필, 그리고 내가 실수한 모든 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큰 휴지통”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의 신화가 되었지만 근거가 있는 아인슈타인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는 가끔씩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늘 따뜻하고 생각에 잠겨 방황하며,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머리를 잘 빗지도 않으며, 양말을 잘 신지 않는 친절하고 점잖은 교수였다.
그는 자신이 “양말을 신지 않고, 호기심 때문에 특별한 경우에만 자동차로 외출하는 구식 사람”이라고 농담했다.
그는 이웃사람에게 “사람들이 양말을 신으라고 해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은 온화한 저항이 상징이 되었으며, 헐렁하고 편안한 옷차림은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는 상징이 되었다.
이발과 머리 빗기를 싫어했던 그의 습관이 유행이 되어 엘자, 마르고트, 여동생 마리아도 똑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다녔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이 부와 불평등과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유럽보다 능력을 더 존중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좋아했다.
그는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민주적 성향 때문이다. 마누도 다른 사람이나 계급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감탄했다.
그는 “미국의 젊은이들은 낡아빠진 전통에 신경써야 할 필요가 없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6개월이 지난 1934년 4월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연구소에서 전임으로 일하면서 영원히 프린스턴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나머지 21년을 프린스턴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기로 한 아인슈타인이 시민권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아인슈타인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일부 하원의원들의 제안을 알려주었지만 아인슈타인은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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