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는 주제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가 <화가의 노트 A Painter's Notes>에서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고 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미학으로 받아들여진다.
표현에 대한 마티스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야수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했고 이는 체계적으로 전개된 프랑스 표현주의로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마티스는 얼굴을 초록색으로 나무를 붉은색으로 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눈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 것을 마음에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화가 자신의 감성과 사고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려는 노력이 라틴족에 한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도 이런 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다리 그룹을 중심으로 발현된 게르만족의 표현주의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족의 표현주의와 비교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표현주의는 모두 1905년에 발현되었고 미술사에서는 이 해를 표현주의의 출발로 삼고 있다.
쉴레와 코코슈카에 의해 전개된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는 조금 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적으로 나타난 것이 특기할 만하다.

표현은 회화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조각, 건축, 영화, 댄스 등 다양한 예술에서 20세기의 새로운 개념으로 확산된 미의 혁명이었다.
눈으로 분별하는 미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분출되는 솔직한 감성과 사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는 미의 제전이었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시각예술을 시각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정신의 문제로 확산시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만이 아니라 막 잠에서 깨어나 하품하는 여인의 모습도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고, 수줍어하는 여인의 누드뿐만 아니라 가랑이를 벌리고 음부를 드러낸 여인의 누드로 아름답다.

표현주의는 주제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표현주의자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무시하고 색을 기분 내키는 대로 사용하게 된다.
황혼의 하늘과 대지를 강조하기 위해 온통 붉은색을 칠할 수 있고, 바다를 핑크색으로 칠해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화상이나 여인의 누드를 정충으로 장식할 수도 있고, 인물을 공중에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회화와 조각을 시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고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이런 사고가 유럽에 만연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 표현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산이나 들에서 주제를 찾는 대신 작업실이나 카페에서 동료들과의 열띤 논쟁을 통해 문학, 철학, 신화 등에서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회화는 문학, 철학, 신화 등의 도움으로 내용이 풍요로워졌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술가의 공상과 환영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데는 데카당스 문학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시와 소설이 캔버스의 이미지들로 나타나는 경향이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정의를 전면으로 부정하기에는 아직 미흡했다.
왜냐하면 상상의 세계 역시 가시적 세계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변화는 부분적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관련이 있다.

회화를 재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시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의 모방'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다.
19세기 말에 나타난 이런 조짐이 표현을 위해서라면 가시적 세계마저도 정신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그림들이 나타났다.
회화적 구성을 위해 눈에 보이는 대상을 색으로 쓱쓱 문질러 없애거나 색의 대비로 배경을 바꾸었다.
또한 자연주의 색을 거부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색으로 대신하고 지나친 과장과 생략을 통해 관람자의 시각과 판단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