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혁명, 1905~10년

 
1905년과 1910년 사이 6년 동안의 서양미술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면 20세기 미술 전체를 거의 이해하게 된다.
1906년 스물 여섯 살의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을 대표할 만한 <아비용의 처녀들>을 그렸다.
이 그림은 최초의 입체주의 그림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더라도 당시 예술의 변방 콩고인의 가면이 유럽 예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게다가 예술의 변방 사람들이 사용하던 가면이 유럽인의 전통 미의 의식을 경악시키고 미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형성한 서양미술의 울타리는 타히티 섬에서 말년을 보낸 고갱에 의해서 이미 무너지는 조짐을 보여왔고 스페인 청년 피카소에 의해 아프리카 미술도 서양미술의 울타리 속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1910년은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완전추상의 쾌거를 올린 해였다.
그해 이탈리아인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문명으로 열려진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미학 선언문을 발표했다.
칸딘스키는 모스코바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그림을 보고 과연 대상에 대한 묘사가 회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대상에 대한 묘사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완전추상에 도달했다.
이는 미술사에 구둣점을 찍을 만한 큰 사건이었다. 달리는 자동차와 공장에서 뿜어나오는 연기를 그리면서 스스로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자처한 미래주의자들의 기계주의를 찬양하는 미학 선언문과 칸딘스키의 완전추상 의지는 20세기 미술을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서양 예술가들은 추상이란 말이 대상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갱이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했듯이 대상을 가까이서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창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데서 대상을 다르게 묘사하는 것을 추상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대상을 비사실주의로 묘사하기만 하면 추상이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이는 추상의 개념이 분명해진 오늘날의 정황에서나 가능한 질문이고 20세기 초에는 대상을 회화적인 목적으로 시각적으로 왜곡되게 재현하기만 해도 추상으로 이해되었다.
한 마디로 추상은 외부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에 눈을 돌려서 예술가 자신의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다.
초기의 추상은 상징을 통한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여 자체의 논리를 구축하려고 했으므로 동그라미․정사각형․입방체 등을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런 기하적 형상들이 조형주의로 진전될 수밖에 없었다.

양차대전 사이 때만 해도 많은 추상 예술가들이 동그라미․정사각형․입방체 등을 사용한 기하적 구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2차 대전 후에는 더이상 기하적 형상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형상들이 과학과 기술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지나치게 비개성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으로 하여금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 세계에 집착하게 했고 스스로의 실존 문제를 더욱 시급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이성에 대한 반성이 2차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의 추상 예술가들로 하여금 개성을 나타내는 추상을 추구하게 했으며 이런 추상에 초현실주의,실존주의 철학,선불교 미학이 크게 작용했다.

뉴욕 모마Museum of Modern Art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 주니어는 최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로 칸딘스키를 꼽았는데 칸딘스키가 "내적 필요성의 예술 art of internal necessity"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개성은 2차 대전 후 예술가들에게 추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는 말로 모던 철학의 문을 열었는데
전후 추상 예술가들은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 I paint, therefore I am"라고 말하듯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현재의 예술가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