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병 ALS(운동신경병)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가능한한 평범한 인생을 살려고 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상태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리고 그런 부자유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어렸을 적 활동적이 아니었으며 공을 갖고 노는 놀이들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스포츠나 신체적인 운동들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하고나서는 보트의 노를 젓거나 키를 잡는 운동은 제법 했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나 자신이 조금씩 볼품없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한 번 혹은 두 번 쓰러지기도 했다.
내 병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듬해 캠브리지 대학원에 진학한 후 어머니께서 나를 가정학 의사에게 데리고 가서부터였으며 의사는 내가 전문의사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어머니께 권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을 때 나는 막 스물 한 살이 되었다.
나는 두 주 동안 입원하여 진찰을 받았다.
병원측에서는 나에게 무슨 병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갖가지 테스트를 하면서 고작 비타민만을 복용시켰다.
나는 내가 수년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는 나더러 캠브리지에 돌아가 연구를 계속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전에 죽고말 것이란 생각 때문에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바그너의 곡을 듣고 지냈는데 잡지들은 내가 과음한다고 허풍을 떨었고 이런 기사는 다른 잡지사들로 하여금 그대로 복사해서 보도하게 만들면서 그들은 훌륭한 기사감으로 여겼다.
기사란 자주 반복해서 보도되면 자연히 사실이 되고 만다.
나는 인생에 회의가 생겼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가치할 것이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무엇인가 선한 일을 남기고 싶어졌다.
결국 나는 죽지 않았으며 나 자신 이전보다 인생을 더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나의 연구에 진전이 있었고, 나는 약혼 후 결혼을 발표했으며, 캠브리지에 있는 카이우스 대학에서 급여를 받는 연구원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나의 건강 상태는 나의 연구에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며 운도 딸아서 나의 연구 내용들이 학계에 환호로 받아들여졌는데
같은 시기에 나의 부자유함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강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만 할 수 있는 혜택을 대학측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나는 결혼했으므로 대학 근처에 작은 집을 세얻어 살다가 대학으로부터 돈을 빌려 나중에는 그 집을 구입했다.
4년 동안 그 집에 살면서 나는 층계를 오르내리는 일이 자꾸 힘에 겨웁게 되었으며,
대학은 나에 대한 배려로 대학 소유의 건물 아래층을 내게 주었고,
그 집은 크고 문의 폭이 넓어서 좋았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 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세 아이들은 매우 좋아했다.
1974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스스로 음식물을 먹을 수 있었고 스스로 침대에 눕거나 침대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아내 제인이 날 도와주었지만 일이 너무 많아지자 나의 제자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기거했다.
아내와 제자는 내가 침대에 눕거나 일어나는 일을 도왔다.
나는 좀더 부자유스러워졌으며,
1980년에는 대화하는 시스템을 바꾸었고,
개인 간호사가 조석으로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날 간호했다.
이런 생활은 내가 폐염에 걸린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폐염 수술을 받았고 그후부터 24시간 간호를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한 비용을 몇몇 재단들이 맡아주었으므로 가능했다.
수술받기 전에는 불분명하지만 내가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적어도 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비서에게 말하면 비서는 종이에 과학에 관한 나의 내용을 기록했고 내가 세미나를 주관할 경우에는 통역자가 나의 말을 좀더 분명하게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수술 후 나는 전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잠시동안 나의 의사소통 방법이란 내가 눈섭을 올려 신호하면 알파벳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알파벳들을 끄집어내어 문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화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같은 나의 처지를 안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의 컴퓨터 전문가 왈트 월토츠가 이퀄라이저equalizer라고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내게 보내주었다.
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니 나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갖가지 메뉴들을 손으로 스위치를 사용하여 단어들을 선택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나는 손이나 눈동작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말하기를 바라는 것을 확성기를 통해 알릴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컴퓨터를 책상에 놓고 사용하는 동안 캠브리지 대학의 대비드 메이슨은 이런 기구를 작은 컴퓨터로 제작해 휠체어에 부착시켜 사용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기구는 나로 하여금 이전보다도 더욱 의사소통을 잘 하게 해주었으며 나는 1분에 15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말을 한 후 이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보존하거나 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두 권의 책을 썼으며, 과학에 관해서 많은 논문들을 썼다.
나는 과학에 관해 그리고 일반적인 것들에 관해 많은 대화를 했으며 사람들이 이를 잘 받아주었다.
내가 사용하는 확성기는 좋은 질의 소리를 내주었는데 오지 문제가 있다면 미국 액센트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소리를 갖게 되었으므로 영국 발음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확성기를 계속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느낌이다.
나의 병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지만 이 병이 나로 하여금 가족과 함께 지내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하문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못하다.
나는 나를 돕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단체들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희망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