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에서 비롯했다.
뱅상 드 보베는 <사면경>에서 "능산적 자연은 곧 자연물들의 지고한 규범이나 패턴인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라고 했다.
그는 능산적 자연을 조물주로 보았으며 소산적 자연을 피조물로 보았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에는 자연을 창조에 한정했는데
신은 자연의 창조주이나 자연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예술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할 때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과 가시적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엔네아데스> 제5장 앞부분에서 "예술은 한낱 가시적 사물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원천을 이루는 원리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 즉 가시적 사물 전체를 생산해내었고 또 생산해내고 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천 년 후 알베르티도 <회화론>에서 플로티누스가 말한 의미로서의 자연을 언급했다.
타타르키비치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오늘날에까지도 수용되고 있음을 <미학의 기본 개념사>에서 지적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주제는 눈에 보이는 사물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이었던 반면 폴 세잔의 주제는 플로티누스와 알베르티가 말한 자연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리스인이 자연은 질서정연하며 합목적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운동이나 정지의 근원이 된다면서 이런 내적 원리를 지녔을 때 "하나의 자연 혹은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한 그는 궁극적 원인을 형상, 질료, 운동, 목적 넷으로 보고 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Idea 혹은 형상Form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질료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여러 개의 형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개물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보았으며, 질료가 형상을 얻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보았고, 사물의 실재, 즉 현실적 활동energei 혹은 완성태entelekheia로 보았다.
그에게 질료는 가능태dynamis로서 참나무 씨앗이 참나무의 가능태인 것처럼 사물로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질료 자체는 형상을 결여하기 때문에 단지 가능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질료가 형상을 욕구할 때 생기는 것이 운동으로 이는 가능태가 현실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질료가 욕구하는 운동의 대상인 형상을 그는 본래 신성을 지닌 좋은 것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원인들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목적을 갖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필연적인 목적을 갖고 작용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는데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적자생존에 대해 논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한 이유는 사건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발생하므로 일련의 사건이 한 가지 완성될 경우 앞서 일어난 사건들은 완성을 위한 단계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지막 완성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식의 설명은 동, 식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과학의 발전에는 장애가 되고 특히 윤리문제에 걸림돌이 된다.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형상들 중 모든 타자를 움직이는 단일한 '부동의 원동자 First Mover'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순수 형상'으로 누스Nous(Reason) 혹은 사유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누스가 "자신을 사유하는 것" 혹은 "사유의 사유"인 것이다.
누스 혹은 사유는 훗날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신의 개념에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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