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문학 교수 최병현 씨가 자신의 저서 세 권을 보내왔습니다.
최교수는 유성룡의 <징비록>을 영어로 번역해 버클리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했습니다.
그는 또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공부를 지독히도 많이 한 분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
그분이 시집 서문에 시에 관해 쓴 것이 마음에 들어 함께 나누고 싶어 옮김니다.
시는 끊임 없이 출렁이며 부서지며 파도도 갈매기도 없는 영원의 바다로 흘러가는 물방울들의 아우성이요, 노래요, 하품이 아닐지?
푸른 하늘과 물새 그림자, 도심에서 쏟아지는 하수와 오물이, 욕망과 해탈이, 한데 얼려 물거품을 이루는 애절하고 격조 높은 합창이다.
밤새 처놓은 그물에 걸린 흥겨운 뱃노래와 배가 뒤집힌 자의 숨가쁜 절규, 내가 이제까지 배우고 알아왔던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놀랍고 섬뜩한 것이, 시이다.
도대체 시란 무엇일까?
이 지겨운 질문을 평생 주문처럼 외웠건만 기적은커녕 문제로부터의 해탈은 요원한 것만 같다.
그러나 나를 늘 물레방아처럼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가 좋다.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끝없는 높이와 깊이가 나를 사로잡는다.
시중의 어떤 시는 다른 시에 비해서 시가 무엇이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러나 본질에 관한 질문은 항상 어렵고 자칫하면 쉬운 답변의 미궁에 빠지게 된다.
내가 시를 쓰며 만족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시의 본질적인 문제에 터치다운했을 때이다.
시는 어떤 주제를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된다.
시에 있어 내용은 시 자체와 비교할 때 조역에 불과하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메세지가 아니요 언어 속에 꿈틀거리는 영적인 근육과 아름다움의 속살이다.
시는 언어의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언어의 형이상학과 실존의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하나이다.
이것은 오직 시로서만이 증명될 수 있다.
이 같은 시적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항상 시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멀리 갔다가도 다시 처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헤라클리투스의 강물의 법칙을 거역하고서라도 말이다.
되돌아가지 않는 방황은 무의미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시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시작이야말로 목적이요 끝이다. (In my beginning is my end - Eliot)
1. 시는 항상 건너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는 강물에 독자의 머리를 감기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실어 나른다.
건너편의 세계란 영적인 세계와 더불어 언어 내지 표현의 저편을 의미한다.
언어는 언어로서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심오하다.
시인은 그 곳을 찾아 끊임 없이 강줄기를 헤맨다.
2. 시는 일상적인 언어를 상상의 언어로,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언어는 이것을 저것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적인 속성을 자체 내에 내장하고 있다.
적어도 시인만은 이런 이론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비전이나 투시도가 완벽하면 할수록 시인의 시도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졸작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시는 언제나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3. 우리가 사는 세계는 헤아릴 수 없는 시적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해와 달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래와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제 시의 대상은 어쩌면 이런 것들이 아니라 태초부터 대상과 대상간의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시적인 대상은 바위와 나무가 아니라 바위와 나무 사이에 존재하는 창조적이고 신비스런 공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시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시가 시의 본질에 접근하면 할수록 이 보이지 않는 공간의 세계를 개발하고 확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는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지어준다.
시의 중요한 역할은 이것과 저것 사이를 황금으로 메우는 일이다.
공간은 모든 꿈꾸는 자들의 캔버스이다.
상상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믿음도 일종의 상상력이라 말할 수 있다.(William Blake)
시가 있기 전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모르는 남남이었다.
시가 있은 후에 그들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시는 모든 존재와 만물의 중매쟁이이다.
시인은 뮤즈의 치마 바람 속에 산다.
그녀가 돌아다니는 곳에 활기가 있다.
4. 한 대접의 냉수가 푸른 하늘을 담을 수 있다면, 한 편의 시가 삶 전체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인가?
시는 형태에 있어 지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이기 때문에 안방에 우주 전체를 들어 앉히기에는 늘 역부족이다.
대개는 온 몸이 거울인 강물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과 풍경을 비출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시는 늘 역사와 만나고 만나자마자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강물의 이별은 사건과의 이별일 뿐 역사와의 이별은 아니다.
시는 감방처럼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공간 때문에 궁궐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표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시가 미시시피 강처럼 길다면 시는 벌써 말라버렸을는지 모른다.
시의 신비와 매력은 모순과 역설에 있다.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예술세계의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