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장배경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밤나무골 용식이", "만수의 아들 용팔이" 식으로 부르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야고보를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마리아는 "야고보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다)
예수에 대한 호칭에서 우리는 그가 나사렛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와 누가는 나사렛을 큰 동네처럼 기술했지만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 산간지대의 그리 경사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해발 380m의 조그만 마을이다.
나사렛은 구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만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로 B.C.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예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가 바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분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복음서 1:46)

이렇듯 나사렛은 베들레헴처럼 유대의 왕이 나실 곳으로 예언된 마을도 아니고 예루살렘처럼 경건화된 곳도 아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락이었다. 나다나엘의 말처럼 그야말로 특별히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이 바로 예수가 성장한 고향이다.

갈릴리 지방은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비가 적당히 내려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며 갈릴리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4km이며 둘레는 약 50km이고 넓이는 약 170 제곱킬로미터나 된다.
호수의 북쪽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이루며 호숫물은 남쪽으로 흘러 요단 강을 거쳐 사해로 빠진다.
호수는 고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작은 하프 모양의 악기처럼 생겼는데 양손으로 줄을 뜯어 연주하는 이 악기를 헤브라이어로 '긴노르 kinnor'라고 부른다.
호수의 모양이 긴노르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긴네렛 호수라고 불렀고 예수 당시에는 게네사렛 호수로 불렀다.
복음서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이다.

<유대 고대사>의 저자 요세푸스는 갈릴리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는 갈릴리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다고 하면서 특히 게네사렛 호수 주변의 온화한 기온을 지적했다.
오래 전부터 대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지었고 부유한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와 대지주가 되었다.
갈릴리의 대지주들이 농부와 노동자를 혹독하게 부렸으므로 그들이 대지주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음이 예수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갈릴리라는 말은 '민중들의 지방'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형성되기 전부터 붙여진 명칭이다.
옛날엔 갈릴리를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불렀다.(마태복음서 4:15)
유대 지역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배타적이라고 여겼지만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신앙에 비해 오히려 순수한 편이었다.

갈릴리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나세렛은 예수 조상 때부터 살던 마을이다.
예수는 가축을 기르는 우리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보잘것 없는 촌락에서 성장했다.
나사렛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했음을 알려주었다는 집이 있는데
그곳에는 오늘날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가 있다.

예수는 적어도 여섯 남매와 함께 성장했다.
결혼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여러 누이들 외에도 네 형제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복음서 13:55-56)

예수가 처형된 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 요셉의 헬라화된 이름인 요세, 신약성서 유다서의 저자로 믿어지는 유다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는 시몬이 예수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조상의 이름에서 딴 것이며 요세Joses와 예수Jesus는 헤브라이어를 그리스어로 부른 이름이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건축업자가 아니라 목재를 다루는 목수였다.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요셉이 목재로 된 농기구나 쟁기, 멍에 등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예수가 청년이었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불리웠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직업도 목수였다.(마가복음서 6:3)

나사렛에 보존되어 있는 예수 당시의 서민주택을 보면 흰 석회를 바른 골방에 창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예수가 살던 집도 그와 같은 골방이었을 것이다.
당시 갈릴리 목수들의 대부분이 품팔이꾼이었듯이 예수도 일감을 찾아 이동네 저동네로 다니며 노동을 해서 홀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나사렛에는 불구자와 병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비교적 추운 동네라서 동풍이 부는 계절에는 폐렴환자가 급증하며 이질도 가끔 발생하고 말라리아 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복음서에 언급되는 고열병 환자와 귀신들린 자는 말라리아 환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예수는 귀신들린 자와 갖가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병자들을 낫게 했다.

나사렛에서 성장하는 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이라고는 회당에서 행해지는 구약성서에 관한 가르침이 전부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배웠다.
그가 회당에서 강론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읽을 줄 알았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줄도 알았다.
그가 구약성서를 읽은 것으로 보아 헤브라이어를 알고 있었으며 일상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갈릴리가 헬레니즘 지방에 근접해 있으므로 예수와 제자들은 그리스어도 알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이해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예수는 예언자들 중 이사야를 가장 존경했다.
그는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이사야의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기를 즐겨했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은 적도 있었다.(누가복음서 4:16-17)
그는 헬레니즘과 로마의 풍습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는 영향을 받은 바가 없다.


이 글은 나의 저서 <예수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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