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디키의 탄감주의
서양에서의 비평criticism(kritik, critique)은 18세기 중엽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 회원을 중심으로 루브르 궁전의 한 화랑에서 시작된 살롱전에 대한 디드로D. Diderot(1713~84)의 비평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전통은 19세기 영국의 러스킨, 프랑스의 스탕달Stendhal(1783~1842), 보들레르C. Baudelaire(1821~67), 공쿠르 형제E. I. A. de Goncourt(1822~96)와 J. A. H. de Goncourt(1830~70) 등을 통해 이어졌다.
미술비평은 어떤 작품을 놓고 구체적인 경험, 미적 판단을 이론화하고, 정당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출현한 후 비평도 달라졌는데,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1906~78)는 예술가의 작품창조의 행위에 중점을 두는 비평을 했고, 같은 시기에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는 전통적인 회화관에 입각하여 유럽 회화의 역사적 전통과 연결시키면서 추상표현주의를 비평했다.
그린버그는 과정보다는 완성된 작품에 중점을 두었다.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작품의 가치를 논하는 것으로 이는 비평가가 어떤 규준 혹은 규범을 저울삼아 그 위에 올려놓고 중량을 저울질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로젠버그가 작품창조의 행위에 관한 규범을 정한 것이나 그린버그가 과정보다는 완성도에 관한 규범을 정한 것이나 둘 다 개인적인 선택에 근거한 작품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서인데 엄밀히 말해 가치에 대한 욕망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어떤 규범을 가지고 작품을 비평 혹은 가치를 논하더라도 미술사가 존재하는 한 그 판단은 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객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제솝T. E. Jessop은 논문 <미학적 가치의 객관성 The Objectivity of Aesthetic Value>(1969)에서 속성소屬性素, 즉 작품에 내재하는 구성 요소가 판단의 규범이 된다고 주장했다.
“미학 이론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판단 규범인데, 미적 판단의 유일한 규범은 아름다움이라고 정의되는 속성소이다.
그리고 완전히 미적 판단을 보장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유일한 정의는 … 대상들의 어떤 속성소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작품에 이러저러한 속성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속성은 존재의 사실이지만 사실 자체가 가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작품에 내재한 속성들이 다른 작품에 부재한다고 해서 후자가 전자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으며 때로는 한 작품의 속성은 그 작품의 존재에 의의가 있더라도 다른 작품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비평을 감상자의 반응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경우 작품의 가치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감상자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비평을 감상자의 반응으로 보는 것에 대한 부정을 조지 디키George Dickie는 『미학 Aesthetics』(1971)에서 세 가지로 나눠 고찰한 탄감주의Emotivism, 비평단일주의Critical Singularism, 상대주의Relativism로 설명했다.
그는 탄감주의는 하나의 의미론으로 문법적 구조와 논리적 구조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장미꽃은 빨갛다’는 명제와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명제는 주어와 술어를 갖추었지만, ‘장미꽃은 빨갛다’는 명제는 장미꽃의 객관적 속성을 서술하나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명제에는 객관적 속성이 결여된 채 감상자의 반응만 나타낸 것으로 장미꽃을 서술하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비평가들은 이 두 명제가 문법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추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장미꽃은 빨갛다’는 명제는 인식적 내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것은 사이비 명제로서 그런 인식적 내용이 부재한다.
‘아름답다’는 술어는 대상에 대한 성질이나 속성을 지칭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오직 탄감적 기능을 할 뿐이다.
‘그 작품은 훌륭하다’는 명제도 마찬가지로 대상에 대한 성질이나 속성을 지칭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도덕적·예술적 차원에서 탄감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이 좋다’, ‘이 작품은 위대하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등의 작품에 대한 판단 혹은 평가는 객관적으로 추정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감상자의 느낌이나 반응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