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과 비례는 르네상스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드로잉은 한 마디로 대상을 명확하게 관찰한 후 원근법으로 정리하는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의 부분들을 실질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먕확하게 각 부분들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원근법이란 말은 '앞을 바라본다'는 뜻의 라틴어 프로스펙투스prospectus에서 온 말이다.
소위 말하는 직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은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었다.
직선 원근법은 삼차원의 공간에 나타난 선이나 형태의 시각적 변화를 재현할 수 있게 해준다.
르네상스식 원근법은 대체로 서양인에게 공간의 사물을 투시하는 가장 적합했던 방법으로 평행선을 관찰자의 눈높이인 수평선의 소실점vanishing point으로 모이게 하고, 보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형태를 점차 작게 그리는 것이다.

사실주의 회화는 이런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이런 지각 시스템을 뒤러Alberecht Durer(1471-1528)가 말년에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동판화 <여인의 투시도를 그리는 제도사>에서 시점을 수직선과 낮추게 하기 위해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세워진 격자 철망을 통해 투시하게 한다.

화가는 모델의 시각적 영상을 원근법으로 축소해서 볼 수 있는 시점에서 그 모델을 바라보게 된다.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중심축선이 화가의 시선과 일치하는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인 인물의 머리와 어깨는 실제 크기에 비해 작게 나타나고, 가까이 있는 무릎과 다리 부분은 보다 크게 나타난다.
뒤러의 제도사 앞 테이블 위에는 격자 철망과 동일한 크기의 격자가 표시된 종이가 놓여 있다.
화가는 철망을 통해 명확한 각도, 굴곡, 선의 길이 등을 수직, 수평선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지각한 바를 종이에 그린다.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리면 원근법에 의한 모델의 단축된 형태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비례, 형태, 크기 등은 화가가 알고 있는 실제 인체의 비례, 형태, 크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각된 그대로, 즉 사실과 다른 비례로 그릴 경우에만 실제와 같아진다.

뒤러의 시스템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입체적 공간의 환영을 어떻게 평면에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즉 어떻게 가시적인 세계로 재창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사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복잡한 수학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는데 뒤러가 이 간단한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로 하여금 대상의 실제 모습에 시각적 변형과 사실주의 화법에 대한 그들의 정신적인 반발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직선 원근법에서는 고정된 시점을 요구하지만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머리를 확고부동하게 고정시키고 작업할까?
엄격하게 원근법의 규칙 내에서만 그릴 경우 아주 메마르고 굳어버린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이 눈앞에 어른거려 (예술가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흔적을 보이는 일이 없어 그것이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예술이다"는 칸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은 창작의 수단일 뿐 화가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투명한 정신으로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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