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드로잉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 드로잉 테크네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를 사랑하는 행위 그 자체가 존엄성의 추구인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지우는 개념으로 철학적 배경은 인간의 영혼이 미beauty와 자연의 일치에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이런 개념을 고취시켜 르네상스를 인본주의로 꽃피운 사람이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이다.
'플라토닉 러브 amor Platonicus'란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한데 조화시킨 장본인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인간이 미와 자연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인체 드로잉에 전념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대가들과 같은 훌륭한 드로잉이 미술에서 거의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드로잉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혀지는 것이며 미와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명상과 맑은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화가들은 이런 노력을 기피하기 때문에 훌륭한 드로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진 모범적인 예술가가 있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 모두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이다.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예술적으로 얼마나 놀랍게 받아들여졌든지 오늘날에도 믿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보게 되면 "오, 미켈란젤로!"라고 감탄한다.
그가 타계하고 60년이 지난 후 그의 편지 495통이 발견되었는데 편지에 쓴 많은 시에서 그가 또한 시인이었음이 알려졌다.

당대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으로는 연장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었다.
외적인 사실주의 묘사에 있어서는 해부학에 근거한 레오나르도의 완벽한 드로잉이 뛰어나지만, 내적으로 투명한 정신과 미적인 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는 미켈란젤로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레오나르도 자신도 시인의 영혼을 가진 미켈란젤로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단테에 관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들에게 미켈란젤로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단테를 잘 아는 사람이 저기 걸어가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빈정거렸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하고 그냥 지나쳤다.
상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명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정진했다.

그의 정신의 일면을 알게 해주는 시를 하나 소개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eu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 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렇게 번역해보았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Hear no my fault with thy chaste ear,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nor raise toward me thy righteous arm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Lord, in the hours stretch toward me thy forgiving arms

<최후의 심판>은 분명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 이후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작품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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