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부를 누리게 된 예술가들


작품을 주문한 사람과 예술가의 관계가 때로는 시간제 보수를 지급받는 임금제 노사관계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1485년에 체결된 한 계약서를 보면 기를란다요는 작품에 사용되는 물감 비용까지 명시했다.
1487년에 리피가 체결한 한 계약서에는 재료비를 자신이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계약을 1498년 미켈란젤로도 맺었는데, 15세기 말에나 와서야 예술가들은 시간제 임금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 역시 미켈란젤로를 통해 뚜렷이 부각된다.
콰트로첸토(15세기)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발주자가 예술가에게 계약의 완수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이런 보증은 형식이 되었다.
예술가의 의무도 엄격하게 세밀히 쓰지 않게 되었다.
1524년의 계약서를 보면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성인의 이미지만 아니라는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으며, 동일한 수집가는 1531년 미켈란젤로와 계약을 맺으면서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받은 보수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콰트로첸토 후반 피렌체 사람들은 벽화에 많은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기를란다요와 계약을 맺으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가족예배당벽화를 위해 1,100굴덴을 지불하기로 했다.
리피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벽화를 그려주는 댓가로 2천 금 두카트를 받았는데, 이는 2천 굴덴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은 무려 3천 두카트였다.
콰트로첸토 말기에 이르면 예술가들이 돈을 모으게 되는데, 리피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페루지노는 집을 몇 채 갖고 있었고, 베네데토 다 마야노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모로의 궁정화가로 총애를 받으며 2천 두카트의 여봉을 받았고, 그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냉혹하고 유능한 참주 체자레 보르지아의 수석 전쟁기술자로 대접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왕의 총애하는 화가이자 측근으로 매년 3만5천 프랑을 받았다.
친퀘첸토(16세기)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는 거액의 수입을 올려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을 뿐 수입은 많았으며 상 피에트로 성당을 장식한 댓가를 받기를 거절했을 때는 이미 큰 재산을 모은 후였다.
예술가들의 수입이 증가한 것은 물가가 오른 데도 그 영향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콰트로첸토 말부터 친퀘첸토 초까지 로마 교황청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나서 피렌체의 미술 수요와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때 거주지를 아예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겼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친퀘첸토 초부터였다.
이때부터 유명한 예술가들은 후원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귀족계급과 같은 위치를 마련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대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로마에 궁전을 갖고 있었으며, 군주와 추기경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했고, 당시 유명한 귀족이며 미술애호가 아고스티노 치지의 친구였으며, 그의 아내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질녀였다.
티치아노는 라파엘로보다 더욱 더 출세한 화가였다.
황제 카알 5세는 그를 라테라노 궁정의 공작에 임명하고 자기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세습귀족의 권한과 같은 일련의 특권을 부여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투어 그로부터 초상화를 얻고자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티치아노가 그림을 그려줄 때마다 값비싼 선물을 주었고 그의 딸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는 막대한 지참금까지 주었다. 앙리 3세는 노령에 접어든 이 거장을 몸소 방문했으며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에 걸려 죽었을 때 페스트로 죽은 사람은 절대로 성당에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엄격한 관례를 깨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프라리 성당에 시신을 안장했다.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명성에 도달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해서 공적 명예나 칭호, 표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하찮게 여겼는데, 자신이 그들의 반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공작도, 추밀원의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기를 선호했으며 그림은 "손으로 colla mano"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col cervello"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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