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련, ‘한국적 남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거장’


허백련(1891~1977)은 초기 선전에서 잇따라 수상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지만 회화에 관심이 많아 남화 산수에 심취했다.
호남 지역 화가들이 연진회鍊眞會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남화南畵 산수의 맥을 계승한 것은 허백련의 영향에 의해서였다.
허백련을 가리켜서 ‘한국적 남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거장’ 또는 ‘최후의 남화가’라고 하는데, 그의 회화가 정통 남종화에 뿌리를 두고 그 법통을 지키는 가운데 한국적 수묵화를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명대 이후 중국 회화사에서 남북종론은 많은 논란거리였다.
전포석傳抱石은 『중국회화변천사강』에서 남북종 회화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구별했다.

“북종화는 왕실의 회화로서
1, 색채와 골법을 중시하고,
2, 객관적이며,
3, 제작이 쉽지 않고,
4, 작가 개인의 개성 표현이 결여되어 있으며,
5, 귀족적이다.
남종화는 재야의 회화, 즉 문인화로서
1, 수묵, 선염을 중시하고,
2, 객관보다 주관을 중시하며,
3, 비교적 쉽게 제작할 수 있고,
4, 자아의 표현이 가능하며,
5, 평민적이다.”

허백련을 ‘철두철미한 남화작가’라고 말하는데 그가 남화의 거봉 황공망(1269~1354)의 화풍을 지향하여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중시하는 선인들의 선비적 인격완성에 뜻을 두었고 자연을 벗하며 자연 속에서 연아일치然我一致의 경지를 구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조맹부로부터 수학한 원4대가의 우두머리 황공망은 “그림을 그리는 데는 단지 이理의 한 글자가 가장 긴요하다”고 했는데, 조화를 강조한 것이다.
원나라 초기에 조맹부는 회화에 있어 최고의 요구는 “고의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貴有古意)”임을 주장했고, 실천에 있어서는 이성李成의 화북산수화와 동원董源의 강남산수화의 풍격을 추승하는 것이라고 했다.
원4대가 황공망, 왕몽, 예찬, 오진은 이런 복고주의적인 경향의 사조 아래서 이성과 동원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아울러 이를 발전시켜 자신의 독특한 풍격을 창조했다.
황공망은 이理를 강조했는데 장조張璪의 유명한 말 “밖으로는 조화(자연)를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에서 얻었다”는 것은 바로 황공망의 이理와 같은 뜻이다.

허백련은 1891년 11월 2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남밖(현재 남동리)에서 태어났다.
허백련 문중에서 사대부 화가들이 여럿 배출되었는데 허련, 허형, 허건(1907~87) 등은 가계의 화가들이다.
허백련이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화에 탐닉하게 된 동기는 허련이 세운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허형을 만나고부터였다.
허련은 남종화단의 주역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하에서 그의 극찬을 받았다.
김정희는 소양素養을 강조하여 제자들에게 “서화는 가슴속에 깊은 소양을 배양하고 난 후에 집중하여 낙팔하면 문자향과 서권기書卷氣가 피어나, 유가에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과 다름없는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허백련은 11살 때부터 15살 때까지 운림산방에서 미산 허형(1861~1938)으로부터 화훼화로 시작하여 수묵화의 각종 기법을 전수받았다.
한편 그는 8세 때부터 자신에게 한문을 가르친 스승 정만조의 영향으로 회화에 회의를 느끼고 법률에 관심이 생겼다.
의재라는 호를 지어준 사람도 남도로 유배되어 온 한학자 무정 정만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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