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는 무릎을 치면서 “그것 참 좋군”

해방 이전에 김은호는 미인도 외에도 각종 세, 동물, 꽃, 물고기 등을 그렸으며 소위 신선도로 알려진 갖가지 도석화道釋畵도 많이 그렸다.
이런 것들은 창의적인 작품들은 아니었고 애호가들을 위해 그린 것들이다.
그는 1930년대에 낙청헌화실絡靑軒畵室에서 문하생들을 배출했고 문하생들은 후소회後素會(1936~43)를 만들어 동문작품전을 열기 시작했다. 후소회 창립회원들은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장덕, 조용승, 장운봉, 이유태 등이었다.
후소회란 명칭을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김은호의 부탁을 받은 정인보가 해려 임상종에게 미술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좋은 명구가 없겠느냐고 물었고 임상종은 무심결에 “공자 말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게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정인보는 무릎을 치면서 “그것 참 좋군” 하고 찬동하여 두 사람의 합작으로 후소회란 명칭이 생겨났다.
장우성은 『화단 풍상 70년』에서 후소회의 창립 사실과 전람회 계획 등 널리 알리기 위해 문화부 기자와 평론가 등 몇몇 주요 인사들을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는 태서관에서 만났는데 조선일보 문화부의 홍기문과 안석주, 매일신문의 윤희순, 김규택, 이병각 등이 나왔다고 술회했다.

제1회 후소회전은 후소회가 칭립된 1936년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태평로 조선실업구락부에서 열렸다.
출품한 사람은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노진식, 조용승, 이유태, 정도화 등이었고 김은호와 변관식이 찬조 출품했다.
변관식은 이용문의 도움으로 동경에 유학하여 남화를 전공한 고무로 스이운에게 배웠고 김은호는 북화를 전공한 유키 소메이에게 수학했으므로 두 사람의 화풍이 사뭇 달랐다.
스이운은 선전 심사위원으로 서울에 온 적이 있고 소메이는 동경미술학교 교수였다.
변관식과 김은호는 일본 유학시절 하숙을 함께 했으며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을 나란히 다녔으므로 서울에서도 그림자처럼 김은호가 가는 데는 변관식이 따랐다.

1943년 제6회 후소회전에는 회원이 약 30명에 이르렀는데 정홍거, 정완섭, 김화경, 배정례, 허민, 안동숙, 이규옥, 김학수(1918~), 김재배, 이남호 등이 포함되었다.
이상범도 1943년까지 3회에 걸쳐 청전화숙전을 가졌지만 그 회원 수가 후소회에 미치지 못했다.
이상범은 1933년경부터 문도를 받았으며 그의 청전화숙靑田畵塾은 낙청헌화실의 선묘채색화線描彩色畵 지향과 대조적으로 수묵풍경화水墨風景畵를 추구했다.
김은호의 문하생들은 세밀한 사실주의 채색화를 배웠지만 화단에 진출한 뒤로는 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발휘했다.

해방 후 1949년 가을에 개최된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김은호는 추천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할머니 앞에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의 모습을 그린 <초보>를 출품했는데 이것은 1929년 선전에 동일한 제목으로 출품한 작품의 초본을 이용한 재제작이었다.
이런 재제작 사례는 그 후 종종 나타나며 창작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6·25동란이 발발하기 전 1950년 봄 그는 충무공 기념사업회가 공식으로 의뢰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두 폭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으며 정부가 공인본公認本으로 인증했다.
두 영정 중 하나는 전라남도 순천의 충무사로 보내져 봉안된 문관 모습의 모대본좌상帽帶本坐像이고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한산도의 제승당에 모시게 된 무관 모습의 갑주본입상甲胄本立像이다.
모대본좌상은 화재로 전소했고 갑주본입상은 잘 보존되고 있다.
1953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정부 경축대표로 참석하는 당시 국회의장 신익희의 선물용 특청으로 <여왕의 초상>을 그렸고, 1955년에 논개사당에 봉안할 영정 논개상을 그렸으며, 1960년에는 6·25동란 때 사라진 남원의 춘향사당을 위해 <춘향 春香>(금성 김은호 41)을 그렸다.

김은호가 회고록 『서화백년』에서 제작경위 및 과정에 관해 상술했듯이 <춘향>은 1910년대 어진 제작 이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한국인에게 춘향은 유교 도덕관에 입각하여 절개를 지킨 열녀로서만이 아닌 실존 여부와는 별개로 영원히 만인의 연인이기 때문이다.
1939년 호남은행 은행장 현준호와 식산은행 은행장 하야시 두 사람의 발의로 고증위원회를 거쳐 의견을 모아 춘향을, 당시로부터 170~200년 전 풍속을 참조하여 다홍치마 연두저고리를 입은 입상으로 그렸다.
이 때 권번券番 기녀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창덕궁의 옷감 견본실에 있는 배리불수排梨佛手와 수니(갑사)를 선정하여 각기 저고리와 치마감으로 그렸다.
당시 언론은 이 작품을 ‘조선의 모나리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원작은 6·25동란 때 파손되었고 동일 초본에 의해 1960년에 다시 제작하면서 하단의 자리무늬만 다르게 했다.

김은호는 1961년부터 새로운 운영제도의 고문,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다시 국전에 참여했으며 1965년에는 중앙일보사 창간 축화로 <풍악추명 楓嶽秋明>을 그렸는데 말년의 작품들은 한결 간결하고 색상과 구도의 묘를 강조한 것들로 나타났다.
그는 1962년에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 1965년에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1968년에 대한민국 예술원상, 그리고 1976년에 5·16민족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66년부터 예술원 회원으로 국가의 예우를 받았다.
1977년에 자서전 『서화백년』을 출간하고 1979년 2월 7일 87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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