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뿌리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김기욱이 해방 후 1946년에 발행된 『조형예술』 제1호에 기고한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란 제목의 글에서 일본색 추방과 극복의 문제가 해방 후에도 매우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특히 미술에 있어서 그 영향 [일본화풍]을 지독히 흡수한 것이 동양화였다.
…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 깊이 뿌리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

해방 후 절실한 자책과 반성은 여러 동양화가들에게서 나왔다.
그만큼 일본화가 조선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음을 의미한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은호는 한때 완연했던 일본화 영향의 채색법을 버리고 우리 전통적 필의筆意와 화취畵趣 및 색조로서 자신의 작풍을 재정립하게 된 것은 동아일보 사설에서도 지적했듯이 민족사회의 비판이 작용한 때문이다.
미인도를 포함한 섬세한 인물화와 세밀한 화조화 등이 독보적이던 김은호의 현실 시각과 사실적 정경으로서의 근대적 화제 전개의 변모 및 맑은 채색이 일본화에 가까웠지만, 그는 이런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자신의 수법으로서의 채색화풍을 형성해 갔다.
김은호는 1936년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인 서양화가 박광진, 조각가 김복진과 뜻을 모아 본격적인 종합미술연구소로서 조선미술원을 창설하고 이듬해 봄에는 현재 한국일보사옥 동편 중학동에 아담한 2층 건물을 신축하는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으며 연구생도 상당수 모으는 등 기대가 컸으나 내부 사정으로 몇 해를 지속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그는 창립전 이래 거의 매년 선전에 출품하다가 1930년부터 출품하지 않았는데 총독부는 1937년 그에게 참여작가로 예우하여 출품하게 했다.
참여작가는 김은호가 처음 받은 예우였고 이듬해에 이상범이 참여작가의 예우를 받았다.
그 후 1944년까지 선전에 출품한 원작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1938년작 미인도 <향로>와 1939년과 1943년에 그린 동일한 제목의 <승무> 등은 그의 대표작들로 윤희순은 1943년 제22회 선전 출품작 <승무>에 관해 그 해 6월 7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제22회 조선 동양화평 - 동양정신과 기법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은호를 대표적인 향토화가로 꼽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진작가들 중에 이유태(김은호의 제자)씨가 가지고 있는 특질은 가장 서양적 기법에 침윤되지 않은 것이다.
<지 智>의 배경인 모란은 향토적이고 고유한 품品이 있다.
이 품은 이당의 <승무>에서 근원적인 전형을 볼 수 있다.
이당은 ‘상想의 인人’이 아니다.
‘기技의 인’이다. 기에서 이루어진 품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순수한 ‘회화의 인’이라 하겠다.
그리고 미인화가로서 뿐 아니라, 향토화가로서 높은 자리에 있다.
무녀의 버선발은 장판방 냄새를 풍기고 있다.
흑장삼黑長衫의 용필의 묘, 유려한 선, 부채의 전아典雅, 의문衣紋에 이르기까지 닦여진 기법은 완전하다.
전통의 기법인으로 유일한 존재인 이당에게 더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당의 화면을 성실히 관조한다면 장내의 (다른) 작품이 얼마나 소루疏漏한 기법에서 저회低徊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리라.

이당은 심전·소림 이후 기법인으로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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