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에 지방색이라는 것은

1927년 선전에서 수묵채색화 분야 심사를 맡았던 유키 소메이結成素明는 1927년 5월 2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매우 충실하오’란 제목의 글에서 선전에 “지방색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본인이 나서서 지방색을 갖추라는 발언을 그가 처음 한 것이다.
이어 이듬해 선전 유채화 분야 심사위원 타나베 이타로田邊室도 1928년 5월 6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태도 불분명과 열 부족 - 대체론 성적 양호’란 제목의 글에서 지역색을 강조했다.
“회화에 지방색이라는 것은 간단히 나기가 어려운 것이나, 내지로부터 온 우리들로는 좀 더 맛이 보이는 조선 특유의 작품을 바라는 바이다.”

이태준은 1930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란 제목의 글에서 수묵채색화가들의 맹목적인 일본화 모방 현상이야말로 조선 화단의 위기라고 경고하면서 적었다.
“조선의 동양화는 위기에 있다.
아직 당화첩唐畵帖에서 해방도 되기 전에 일본화를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가장 불쾌한 현상이다.
일본화를 배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소화한 뒤에 자기주관을 통해서 자기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 아닌가 … 수백 년을 두고 당화첩에 붙들리어 급기야는 환장이로 모두 타락한 오늘, 다시 아무런 반성이 없이 일본화첩에 매두몰신埋頭沒身을 하고 덤비는 양은 딱하지 않는가?”

이태준은 위의 글에서 제10회 협전에 출품한 김은호의 작품에 대해 일본색을 거론하는 한편, 이도영의 대작 병풍 <나려기완 羅麗器玩>에 대해 재래식 작품과는 달리 “조선 것과 현대 일상생활의 것”을 취했음을 들어 그 개성을 높이 평가했다.

고유섭은 1931년 10월 23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협전 관평’이란 제목의 글에서 제11회 협전에 출품한 백윤문의 <추정 秋情>이야말로 “갓 쓰고 왜倭 나무신 끄는 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서양, 일본을 막론하고 “자주적 입장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백윤문은 후소회 멤버 중 최고참으로 장승업, 홍세섭, 정학교 등과 함께 19세기 화단을 빛낸 백희배의 친손자로 1927년 제6회 선전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에 걸쳐 입선했고, 1932년 제11회에 특선, 13회와 15회에서도 특선했으며, 제16회에는 무감사 출품했다.
제18회에는 <건곤일척 乾坤一擲>(화단 풍상 68)을 출품하여 특선했다.
1941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 1977년 8월 다시 붓을 잡을 때까지 35년 동안 깊은 겨울잠을 잤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마음의 행로’라고 불렀다.
그가 몹쓸 병을 얻게 된 여유가 선전에서의 좌절 때문이란 소문이 무성했는데, 낚시질하는 사람을 그린 <수조 垂釣>가 1940년 제19회 선전에 특선후보로 올랐다가 입선에 머무는 바람에 실력과 경력으로 보아 마땅히 특선으로 뽑혀야 할 <수조>가 어이없게도 입선에 그쳐 큰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으로 기억을 모두 잃고 화필의 동면을 오래 했기 때문이다.
그가 1978년 9월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자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기 3년 만에 영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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