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바사리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초판을 출간했는데

15세기와 16세기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네오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다.
피치노의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이 규범이 되었다.
묵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다.
이런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가 주장하는 바였다.

바사리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초판을 출간했는데, 미술가들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을 그가 처음 출간한 것이다.
그는 플라톤의 예술은 실재에 대한 모방의 모방이라는 모방론을 받아들였고,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미술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이 학설을 적용하여 그는 고대 미술을 하나의 정점으로 보고 암흑 속의 중세를 몰락으로 이에 대비시켰다.
그런데 중세가 14세기의 예술부흥으로 말미암아 다시 극복되었다.
초판에서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고대가 극복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었던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적었다.
"나는 그의 몇 작품을 본 적이 있지만,
배운 바는 없더라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

바로크의 아버지, 미켈란젤로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으로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의 뜻으로 이 말은 순수미술에서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약진을 특징지운 말이었다.
역사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3년재위)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1505~45)을 호화스럽게 장식하게 하려고 면죄부의 판매를 지나치게 늘였기 때문에 루터와 그 외의 사람들이 교회를 둘로 분리시켰다고 보았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아버지로도 불리우는데, 그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화에서 나타난 비틀리고 긴장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의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는 엄청난 영예이다.
바로크Baroque에 대한 어원이 몇 가지 있다.
영어 바로크Baroc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16세기 반학문주의 학자들이 중세 논리학자들의 삼단논법을 가소롭다고 빈정거린 데서 비롯하고, 이탈리아어 바로키오Barocchi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떳떳치 못한 돈관리에서 비롯하며,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16세기부터 제멋대로 생긴 진주를 그렇게 부른 데서 비롯한다.
이처럼 바로크는 갖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18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낯설고 기괴한 것들을 가리켜 이 말을 사용했다.
18세기 프랑스와 독일 작가들이 바로크적 감각이라고 말할 때는 으례 나쁜 감각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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