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진이 주로 그린 화제는
조석진에게서 조맹부의 필의와 특징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안중식의 작품에서 중국 화가의 방작倣作들이 있듯이 조석진의 작품에서도 동일한 작례作例를 발견할 수 있는데, 조선 말기의 모화慕華 및 사대事大 분위기에서 유명한 중국 화가의 화풍을 배우고 감화를 받은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조석진의 산수화들이 원대 말 4대가에 이은 명·청 시대의 남종 화파 그림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회풍과 필법을 폭넓게 습득하고 자기화 시킨 것은 안중식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같다.
두 사람 모두 오원 장승업(1843~97)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현존하는 조석진의 작품 중 특히 신선도 화제들은 중국 화풍이면서 장승업의 화풍과도 관련이 있다.
장승업의 영향은 안중식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조석진의 경우 조부의 필법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영춘(현재 충북 단양 지역) 군수직에서 해임되어 서울에 와 있던 조석진은 1908년에 농상공부農商工部 산하의 관립공업전습소의 강사로 발령을 받아 학생들에게 도자기 그림 등을 지도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안중식과는 달리 그는 주어진 직업에 만족해했다.
군수까지 지낸 그가 50대 중반에 공업전습소 강사라는 낮은 직위를 받아들인 것도 직인적인 태도였다.
1908년 서울에 근대적인 상업화랑 한성서화관이 생겼을 때 그가 전속화가로 광고된 사실도 또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용인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1911년 3월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학교 서화미술회강습소가 창덕궁 왕실의 운영지원으로 서울에서 발족하자 조석진은 안중식과 함께 화과의 교사로 화가지망생들을 가르쳤다.
서화미술회는 1918년까지 3년 수업과정의 졸업생을 네 번 배출하고 활동을 중단했지만 1920년대 들어서 화단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진들이 서화미술회 출신이란 점에서 조석진과 안중식이 근대 화단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공로가 인정된다.
조석진의 대다수 작품이 1910년대에 그려졌다.
1910년 전후에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미불배석 米連拜石>은 그의 고사인물도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중국 북송 시대의 유명한 화가, 서예가 미불米連이 어느 날 감동적인 기석奇石을 보고 다가가서 옷깃을 여미며 큰 절로 존경을 표했다는 고사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그가 미불을 상상하여 그린 이 그림에 나타난 기석이 신묘한 형상으로 영물처럼 묘사되었다.
형상을 표현한 수묵필치, 먹의 농담, 화면을 압도하는 실재감과 대담한 구도 등이 빼어나다.
삼차원적으로 묘사된 기석은 묵점묵點 속에 치밀하게 청록색점을 보탠 자잘한 점태點苔들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연륜의 자연스러움과 신비감을 느끼게 된다.
조석진이 주로 그린 화제는 산수화, 신선도, 도석화道釋畵 등이지만 영모와 화조화도 더러 그렸다.
화조화란 꽃과 나무 등의 식물과 낱짐승인 조류들을 조합하여 일컫는다.
넓은 의미로는 화론서에 따라 영모, 초충, 어해화魚蟹畵 등을 화조문花鳥門 안에 포괄하고 있듯이 동식물이 결합된 그림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전통 화풍으로 그린 것들이라서 그림 애호가의 고루한 취향에 영합하는 데 치우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안중식과는 달리 실경의 사실적인 표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철두철미 전통적인 심의의 형식을 응용했을 따름이다.
그는 한학의 시문詩文 교양면에서 안중식에 미치지 못해 간단한 화제를 제외하고는 화면에 자제시自題詩를 곁들이거나 옛 명시 구절을 자유롭게 선택한 제시題詩를 써넣은 일이 드물었다.
다른 사람이 제시를 대신 써준 예도 적지 않고 안중식이 써준 적도 있다.
조석진은 1918년에 조선 최초의 미술단체 서화협회書畵協會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서화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초대 회장에 안중식이 선출되었고 이듬해 병환으로 작고하자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는데 안중식이 타계한 지 반 년 후에 그도 1920년 5월 31일 서울에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