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임오군란이다
근대화정책에 대해 양반유생들은 강력한 척사운동을 전개했다.
1881년에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받아와 보급한 데 대해 유생들이 척사상소를 올려 격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상소들은 모두 거부당했고 상소를 올린 유생들은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근대화정책에 대한 민중의 반발은 1882년 군인봉기로 폭발했다.
대개 도시 빈민이었던 구식군대의 하급군인들은 급료지불의 부당성과 신식군대와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며 왕궁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으며 이최응, 민겸호 등 척족세력을 처단하고 개화관료들을 공격했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여기에는 개항 후 곡물가격의 등귀로 인해 더욱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 서울의 빈민들도 상당수 참여했다.
봉기한 군인과 빈민들이 대원군의 재집권을 요청함에 따라 대원군은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는 등 복고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민씨 일파의 정권은 재건되었다.
근대정책의 입안 및 실무를 맡은 관료들 중 김옥균, 홍영식, 사광범, 박영효, 김윤식 등 세도가문 출신의 청년층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시급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화파는 1882년 군인봉기 이후 외세에 대한 인식과 개혁 방식을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두 계열로 나뉘어졌다.
온건개화파는 청나라가 서양세력의 침투를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이라고 생각하고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모방하여 점진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민씨 일파를 타도한 후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의 간섭과 민씨 일파에 의해 점차 정부 요직에서 소외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