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의 동향


뒤샹이 체스에 몰두한 시기 파리의 미술계는 여전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일색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1925년에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세의 살바도르 달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그는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해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런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그림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그림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에른스트가 그린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이쯤 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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