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부서진 <큰 유리>
독일에서 파리로 돌아온 뒤샹과 캐서린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캐서린은 뒤샹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녀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후원자로서 뒤샹을 아끼며 친절하게 대했다.
그녀는 주로 지시하는 편이었고, 뒤샹은 고분고분 지시를 따랐다.
캐서린이 유럽을 두루 다니면서 전시할 미술품들을 빌리거나 구입해 가져오면 뒤샹은 기차 정거장이나 항구로 마중 나가 그녀와 미술품을 안전하게 운반해왔다.
캐서린이 파리에 오래 머물고 싶다고 말하자 뒤샹은 아파트를 얻고 실내를 장식했다.
그녀는 영국이나 독일, 그리고 다른 나라에 갈 때 뒤샹에게 편지 쓰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뒤샹은 늦게라도 답장했다.
그녀는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늘 당신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지독한 짓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물었다.
뒤샹은 “나는 늘 당신의 요구에 기꺼이 응했지요. 난 당신을 종종 나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하며 … 그래서 몇 차례나 당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난 늘 당신에게로 돌아왔어요”라고 답장했다.
캐서린은 지나칠 정도로 뒤샹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그녀는 1929년 말 월급을 줄 테니 자신과 함께 뉴욕으로 가서 무명사회의 관리인이 되어달라고 청했는데 뒤샹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캐서린은 예정보다 일찍 뉴욕으로 돌아갔지만 파리에 오는 일이 잦았으므로 자연히 뒤샹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1931년 봄 파리에 도착할 것을 뒤샹에게 알리면서 전해줄 나쁜 소식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파리에 도착하자 레스토랑에서 뒤샹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1927년 초 전시회를 마치고 뒤샹의 <큰 유리>를 브루클린 뮤지엄 창고에 보관해두었다가 코네티컷 주의 웨스트 레딩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옮겼는데, 일꾼이 상자를 열어보니 유리가 산산조각 나 있었더라고 했다.
유리 두 개를 서로 겹치게 포장했는데 충격을 받아 깨졌다는 것이다.
뒤샹은 훗날 말했가.
“나는 커다란 작품이 부서졌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섭섭했다.
그것이 보수할 수 있을 정도로 부서졌는지 아니면 보수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서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미술에 대한 방침에 의하면 내가 울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당시 미술시장에 값이 매겨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것에 관심이 없었고, 본 적도 없었으며, 그것에 관해 알지도 못했다.”
뒤샹이 말한 방침이란 미술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그가 감정적인 반응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간섭받기 바라지 않았지만 <큰 유리>는 8년이 걸려서 완성한 작품으로 그에게는 유일한 대작이었다.
뒤샹은 모든 에너지와 야망을 미술이 아닌 체스에 두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참가한 시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시합에 참가했는데, 그것은 1930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투르노이 국제시합으로 세계의 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회였다.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벨기에 챔피언 조지 콜타노우스키를 물리쳤고, 투르노이의 승자 사비에르 타타코우어와 겨룰 수 있었다.
이듬해부터 그는 수년 동안 프랑스 대표 팀에 소속되어 각종 국제시합에 참가했다.
대표 팀의 주장은 러시아 태생 프랑스인 알렉산더 알렉하인으로 그는 1927년에 카파블랑카에서의 시합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알렉하인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선수였지만 프랑스 팀의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팀 중에서 체스를 잘 두지 못하는 사람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뒤샹의 경우 이기는 편보다는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뒤샹은 프랑스 팀에 겨우 속할 정도의 실력이었지 그 이상의 재능은 없었다.
미국 챔피언 에드워드 래스커는 “뒤샹은 매우 훌륭한 선수다.
그는 조심성 있게 체스를 두어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려 하기보다는 아주 좋은 게임을 위해 위험한 방법으로 둔다”고 했다.
1950년대에 래스커는 뒤샹의 실력이라면 미국에서 25등 안에는 들 것으로 어림했다.
뒤샹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알고 1933년 말에 챔피언이 되려는 꿈을 포기했다.
그는 “물론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었고, 어떤 챔피언이라도 되고 싶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0년 혹은 그 이상 아주 진지하게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체스에 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미 출판한 책을 다시 편집하여 더 나은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수년 동안 매주 시인 친구 루이 아라공이 편집자로 있는 『세 솨르』의 체스 컬럼란에 글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우편으로 체스를 두기도 하였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을 두고 답장으로 벌이는 시합이었다.
이런 시합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는 그에게는 유리했다.
그는 첫 국제 체스 우편올림픽에 참가하여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것은 4년이나 걸린 시합이었다.
그는 결국 챔피언의 소망을 이루었다.
로세는 회상했다.
“마르셀은 보트처럼 생긴 방에서 아일랜드식 스토브 근처 뒤로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며 우편으로 하는 네 게임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벽에는 네 개의 체스판이 걸려 있었다.
그가 워낙 생각에 열중했으므로 난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