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추상미술의 완성자 바실리 칸딘스키
뒤샹과 캐서린은 슈비터즈와 헤어지고 곧장 데사우로 가서 바이마르로부터 이전한 바우하우스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학교의 책임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그의 아내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미술에 있어 정신적인 차원의 문제에 관하여 언급했는데 캐서린은 그의 설명에 매혹되었다.
칸딘스키는 그때 신지학에 관심이 많았고 캐서린도 신지학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영적인 것에 관하여 진지하게 대화했다.
두 사람은 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런 인식이 사람을 자유롭게 해준다고 의견을 모았는데, 뒤샹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신지학은 요즈음 병든 이성주의로 취급되지만 당시에는 많은 지성인이 이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몬드리안도 신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청기사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미학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과격한 조형주의 창작을 북돋은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871년에 이탈리아의 오데사로 이주했는데 부모가 그때 이혼했다.
그는 이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1876년에 오데사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고, 1885년까지 매년 모스크바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1886년에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했으며, 인류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1892년에 사촌 안자 치미아킨을 아내로 맞았고, 이듬해 모스크바대학 법학부 강사가 되었으며, 1895년에는 모스크바에 있는 인쇄공장의 예술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마담 블라바스키의 신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에게는 보수주의의 신앙이 있었다.
1896년은 그의 인생에 변화를 몰고온 해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프랑스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관람했는데 모네의 <건초더미> 시리즈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칸딘스키는 “난 모네의 <건초더미>에 대한 인상을 끝내 지울 수 없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사물이 그림에 필요한 요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도르파트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의뢰받았지만 사양하고 뮌헨으로 가서 회화를 공부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는 안톤 아즈베로부터 수학했으며, 1900년에 프란즈 본 스턱의 화실에서 수학하며 그곳에서 파울 클레를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직관에 의존하여 추상화를 추구하면서 색조를 강조했으며, 상징주의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색의 서정시적 내용과 유연한 선을 최대한으로 이용했고, 그림에 긴장감을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분위기의 판화적인 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로 세잔,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를 꼽았다.
칸딘스키는 1910년과 1914년 사이 추상화에 몰두했다.
밝은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제목을 <구성>, <즉흥>, <서정> 등으로 붙이면서 음악에서 제목을 구했다.
그는 1910년에 <추상 수채화>를 그렸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회화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물을 전혀 모방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추상이란 개념은 사물을 덜 모방하면서부터 생긴 개념이었고, 칸딘스키가 처음으로 사물의 묘사를 완전히 그림에서 배제했다.
1910년에 그가 체험한 것을 직접 청취함으로써 추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난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깊은 생각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화실 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 시야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선 채로 불꽃이 그림에서 튀는 것을 보았다.
그 그림은 모든 주제를 상실했으며, 아예 사물도 알아볼 수 없고, 온전히 밝은 색 덩이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좀 더 가까이서 그것을 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이젤 위에 세워둔 나의 그림이었다.
한 가지 내게 분명해진 것은 사물의 모습은 나의 그림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으며, 오히려 그림을 망친다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그림은 뮌헨 근교에서 그린 풍경화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유화로 그린 완전추상 <즉흥>은 1913∼1914년에 완성되었는데, 자연을 추상한 나머지 형상을 완전히 말소시킨 것이며, 오로지 선과 색으로만 그린 것으로 신지학의 유토피아 미학의 영향이 농후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추방되었다가 1921년 12월에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이듬해 발터 그로피우스가 건립한 바우하우스에 교수로 초빙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책을 출판했는데 클레와 함께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 있었다.
두 사람은 바우하우스의 가장 훌륭한 교사로 독일 밖에까지 소문이 났고, 캐서린과 뒤샹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