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차라는 그때 겨우 20살에 불과했다
취리히에서 다다 잡지가 발행될 무렵 솜메에서 7월 1일에 벌어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에서 6만여 명의 영국인이 생명을 잃었는데, 이는 하루에 발생한 사상자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영국군대는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하여 독일군대와 힘을 겨루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치열할 때 차라는 저서에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으로 오줌 눌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적었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원시주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미술의 가장 초보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15년 취리히에서는 세계대전의 도살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모여 순수미술을 추구했다.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우렁찼으나 우리는 풀로 붙이고, 시를 지으며 낭독하면서 모든 혼으로 노래했다.
우리는 기본미술을 찾았고, 그것이 우리가 처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으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기를 동경했다.
그러나 이런 미술은 차츰 비난의 목표물이 되었다.
‘산적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첫 다다의 밤을 1916년 7월 14일 볼테르 카바레에서 열면서 음악, 춤, 이론, 선언문, 시, 그림 등이 있는 가면무도회를 성대히 벌였다.
그들은 얀코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입체주의의 춤을 추었으며, 아프리카의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미학을 주장하였고, 기계체조시를 낭송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모처럼 광란의 밤을 보냈다.
얀코는 그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들은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과격한 언어의 구사와 소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하고서는 의장을 무시하거나 격하하는 언행을 즐겼는데, 그들의 허무주의는 좀 더 사회비평주의에 가까웠으며, 완전히 새로운 미술과 시를 창조하려고 했다.
차라는 그때 겨우 20살에 불과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위스로 유학 왔으나 시에 심취하여 온 정열을 시에 쏟았다.
예술가들은 차라를 좋아했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실내에서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을 연결시켜 시라고 낭독하곤 하였고,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략상의 방법을 받아들여 혹평과 독설을 일삼았다.
신문에서 닥치는 대로 글을 모아 시라고 주장하는 이런 ‘우발적인 시들’은 아르프의 자동주의 콜라주와 같았다.
아르프는 1916∼1917년에 많은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는데 사각모양의 종이들을 높은 데서 떨어뜨린 후 풀로 붙여서 <우연의 법칙에 의한 배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다에 대한 아르프의 이해는 취리히의 다다뿐만 아니라 뉴욕과 베를린의 다다를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다의 목적은 인간의 이성적인 오류를 분쇄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체계를 재건하는 것이다.
다다는 오늘날 인간의 논리적인 얼토당토 아니 한 것들을 비논리적인 얼토당토 아니 한 것들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큰 북소리로 행진하는 우리 다다의 의지이고, 비이성을 찬양하는 트럼펫 소리다.
… 다다는 무감각함이 자연과도 같다.
다다는 미술을 대적하며 자연을 따른다.
다다는 자연처럼 직접적이다.
다다는 무한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