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2


1910년까지 추상 미술은 무르익어 갔고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발전되었다.
칸딘스키는 종종 추상 회화를 그린 최초의 인물로 인용되지만, G.H. 해밀턴이 말한 것처럼 사실상 어떤 특정한 화가를 선택하여 그를 최초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초의 추상 수채화’로 알려진 칸딘스키의 작품에는 1910년이라는 날짜와 서명이 기입되어 있지만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이 제작된 것은 그보다 더 이후의 일이며, 칸딘스키가 이를 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기입해 넣은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칸딘스키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초기 추상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최초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작품 제작 날짜를 앞당기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개별 선구자들에 이어서 곧 추상 미술 그룹과 운동이 뒤따라 나타났다.
그 최초의 것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오르피즘과 싱크로미즘이 있다.
아폴리네르가 1912년 ‘섹시옹 도르’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서 전시된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만들어낸 오르피즘Orphism은 비재현적 색채 추상을 의미했다.
아폴리네르는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화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미술이라고 설명했다.
오르피크orphique란 말을 과거에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으며, 아폴리네르는 여기에 낭만적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한 입체주의에 서정적 색채를 가미하는 시도와 쿠프카처럼 순수 색채 추상과 음악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마케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가 오르피즘에 관심을 갖았던 것은 이런 낭만적 연상 때문이었다.

들로네는 1912년에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묘사한 추상 연작 <동시적 원반>과 <원형 리듬>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로지 색채만이 형태이자 주제이다.
미술이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묘사적이고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완전한 표현 수단으로 인해 점차 타락하여 노예 상태나 모방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빛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사물에 비친 빛이나 여러 사물 간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는 빛을 그리는 데 급급하여 빛에 회화적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르피즘은 비록 단명했지만 비재현적 색채 추상의 추구를 목표로 삼은 최초의 운동이었다.
들로네는 후기의 저서 <입체주의에서 추상 미술까지 Du Cubisme a l'art abstrait>(1957)에서 오르피즘이란 명칭을 이런 색채 작품이나 쿠프카의 작품과 유사한 작업, 미국 싱크로미즘 화가 스탠턴 맥도널 드-라이트와 모건 러셀의 작품 등에 한정하여 사용했다.
즉 그는 오르피즘의 기원을 입체주의보다는 오히려 인상주의와 쇠라의 신인상주의로 파악했다.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회화의 형태와 내용 모두를 전달하려고 한 미술 운동이 싱크로미즘Synchromism이다.
파리에서 작업하던 두 명의 미국 화가 스탠턴 맥도널 드-라이트Stanton MacDonald-Wright(1890~1973)와 모건 러셀Morgan Russell(1886~1953)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켰다.
미술 평론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와 형제인 맥도널 드-라이트는 1907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일년 반 동안 수학한 뒤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를 수학했다.
그는 모건 러셀과 함께 색채 이론을 연구했으며, 1912년경 과학적인 색채 배치에 바탕을 둔 회화 이론을 전개했다.
이 이론은 1913년 뮌헨의 노이에 쿤스트 살롱에서, 그리고 그 뒤 파리에 있는 베르냉-죈 화랑에서 열린 합동 전시회에서 발표되었다.
이 이론은 쇠라와 시냐크 등 신인상주의자들이 슈브뢸의 <색채의 동시 대비 법칙 De la loi du contraste stimultane des couleurs>과 O.N. 루드의 <현대 색채학 Modern Chromatics>으로부터 끌어낸 이론들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이 이론은 1913년 이후 들로네와 쿠프카가 색채 원반 추상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
뉴욕 태생의 러셀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6년이었고 잠시 동안 마티스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파리에서 맥도널 드-라이트와 친구가 되어 그와 함께 슈브뢸의 색채 이론을 공부하고 들로네의 오르피즘과 유사한 순수한 색채 회화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맥도널 드-라이트는 1919년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하여 싱크로미즘 회화를 그만두고 컬러 영화를 위한 키네틱 기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편 러셀은 1920년 무렵부터 구상적인 회화로 전환했다.
1930년대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큰 종교화를 그렸으며 1946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러시아에서 추상 미술이 번성했는데, 절대주의 외에도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광선주의Rayonism가 1915년에 시작되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여 그 의미가 모호한 데 반해 러시아 구성주의는 매우 구체적인 명칭이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리시츠키만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 모두 동조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 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란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이런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 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페브스네르 형제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선주의는 러시아 화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행한 회화 양식을 가킨다.
이 운동은 라리오노프가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언문으로 시작되었고, 이 선언문은 191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표적’ 전시회에 맞추어 발행된 문집에 실렸다.
선언문에 따르면 광선주의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즘의 종합이었다. 광선주의 양식은 물체에서 발산되며 가까이 있는 다른 물체에 의해 차단당하기도 하는 보이지 않는 광선에 대한 불분명한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 광선은 어떤 점에서 이탈리아 미래주의 이론에서 요구되던 ‘힘의 선’과 유사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미적 목적에 맞는 형태를 창조하기 위해 이런 광선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물체에서 발산되는 광선은 다른 물체로 건너가면서 광선주의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예술가는 이것을 자신의 미적 표현 욕구에 맞게 구부리고 굴복시켜 형태를 변화시킨다.”
많은 광선주의 회화가 특히 일단의 대각선으로 주제의 해체를 강조한 점에서 미래주의 작품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인다.
광선주의 운동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4년 이후 이젤화를 그만두면서 급속히 종결되었다.

추상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명 내지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일부 예술가들은 거의 종교를 향한 것과 같은 열정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했으며, 1917년에 창립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그룹의 예술가들도 이와 유사했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고,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조직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 두스뷔르흐 외에 창립에 참여한 인물로는 화가 피트 몬드리안, 빌모시 후사르, 시인 안토니 콕크, 건축가 야코부스 요하네스 피테르 오우트Jacobus Johannes Pieter Oud(1890~1963)가 있다.
정기 간행물 <데 스테일>은 반 두스뷔르흐와 동료들의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미술은 혁신적이면서도 자기 만족적이며 새로운 미학적 신조를 포함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반 대중에게 이런 신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간행물의 목적은 이런 새로운 미학의 표출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그것이 추구하는 미의 종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수 조형적 작품을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홍보했다.

그들이 선언한 미적 신조와 미술 양식은 새로운 조형주의, 혹은 신조형주의로 알려졌다.
이는 극단적인 미적 엄격성을 특징으로 하며 재현을 전적으로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표현적 요소들을 직선, 직각과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 및 흰색,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으로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런 엄격한 예술적 금욕성은 신비적인 색채를 띤 철학이나 미학과 관련되어 부과되었다.
이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상황에 반발하며 형성되었다.
시대의 불행은 널리 퍼진 개인주의의 결과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삶의 모든 단계를 집단화하고 비개성화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따라서 완벽한 정확함에 대한 추상적인 이상을 지닌 기계 기술은 장인의 솜씨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주관적인 표현은 예술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다.
윤리적인 면에서 몬드리안은 주관적인 개인주의는 모든 단계에서 보편적인 조화에 대한 추상적 이상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보편적인 조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 예술이 미래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개념에 따라 데 스테일의 추종자들은 좁은 의미의 예술관을 피력했는데,
즉 미술에서 구상적 요소를 제거하고 시조형주의의 미학적인 엄격함을 추구함으로써 시각 예술을 주관적인 감정에 대한 의존과 자연 대상물의 재현에 내재한 가치 체계로부터 해방시켜 예술에 자유를 부여하고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 점차 추상적인 진리의 본질적 원리에 대한 표명으로 옮겨 갔던 하나의 역사적인 과정에서 볼 때 예술의 정화로 간주되었다. 
  

데 스테일은 1920년대에 운동의 범위가 어느 정도 확대되면서 초기의 엄격성을 상실했다.
몬드리안이 인간의 정신성을 개혁하기 위한 신조형 회화의 유토피아적 기능을 예언적인 비전으로 나타낸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점차적으로 건축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실제적인 개혁으로 관심을 돌렸다.
1921년경부터 반 두스뷔르흐는 다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1922년 <메카노 Mecano>라는 이름으로 <데 스테일>의 다다 부록판을 출간했다.
1924년부터 그는 초기의 신조형주의 원리를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요소주의는 조형주의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적용에 대한 수정이며 그것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직선과 직각으로 엄격하게 제한시키기는 하지만 그는 이제 수직, 수평을 거부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역동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허버트 리드는 추상 미술의 가장 심오한 선구자들은 대부분 “형이상학적으로 고뇌하는 민족인 러시아인, 독일인, 네덜라드인”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예술가들에게 추상은 단순히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표현법을 발견하는 문제였다.

몬드리안, 반 두스뷔르흐, 칸딘스키, 말레비치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추상의 선구자들로 모두 미술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칸딘스키는 회화는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과 반 두스뷔르흐의 회화는 엄격하게 기하적 추상으로, 이들의 회화는 추상의 가상적 대극점에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
신지학은 1875년 뉴욕에서의 신지학 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현대적 제의가 된 고대의 철학 체계이다.
신지학자들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믿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는 깊은 조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그들의 사상은, 자신들의 회화가 유물주의적인 서구 세계에 정신의 부흥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추상 미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공식화하면서 예술가가 외관이라는 바깥 껍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는 자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을 색채로 보았는데, 이는 색채가 “정신적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울림”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신지학 책에 실린 보다 높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동반되는 채색 삽화들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애니 베선트와 C.W. 리드베터가 저술한 <생각의 형상들 Thought Forms>(1905)이 있는데, 구름과 비슷한 형상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의 독일어판이 1908년에 발간되었고 칸딘스키는 이것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안은 1909년에 신지학 협회의 일원이 되었고 평생 동안 회원으로 활동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몬드리안도 추상 미술이 외관을 관통하여 그 아래에 있는 더 큰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명확하고 균형 잡힌 자신의 미술이 우주적인 시각적 조화가 삶을 지배하는 사회에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다.

일반적으로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는 구상 미술이 지배적이었고 추상 미술은 대중적으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추상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성하게 성행했는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로 유럽에서는 앵포르멜로 나타났다.
1960년경 추상 미술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서양 미술의 지배적인 정통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도 그 접근에 있어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은 고매한 정신을 가졌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행했던 것과 같은 철학적 정당화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추상 예술가들이 나치 독일과 소련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금지했던 전체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때로는 추상 미술에 서구의 사상적 자유의 화신이라는 도덕적인 차원이 부여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런 억압의 공포를 피해 뉴욕으로 탈출한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미국에서 추상 미술을 지원한 것은 거의 애국심의 한 형태로 생각되었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적 유형의 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운동에 관한 권위 있는 저서들 중 하나인 어빙 샌들러의 <추상 표현주의>(1970)에는 ‘미국 회화의 승리 The Triumph of American Painting’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추상 표현주의는 미술에 있어서 위대한 분기점을 의미하며, 이후의 많은 발전은 추상 표현주의로부터의 진화이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반동이었다.
여기에는 특별히 팝 아트의 형식으로 대표되는 구상의 부활도 포함되지만 1960년대를 풍미했던 후기 회화적 추상, 옵 아트, 미니멀 아트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추상도 포함된다.

추상 미술의 몇몇 대표자들과 지지자들은 추상이 과거의 가장 위대한 미술과 같은 높은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는 “삼각형의 날카로운 각이 원에 닿을 때의 충격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의 손가락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는 장면 못지 않는 강렬한 효과를 낸다”라고 적었다.
키스 본Keith Vaughan(1912~77)은 칸딘스키의 그런 언급에 대해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간결하게 응답했다.
서식스의 셀시힐 태생의 본은 거의 독학으로 회화를 배웠으므로 1940년대 중반까지 영국 회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1946년부터 캠버웰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본의 1950년대 그림은 드 스탈의 방식으로 점차 평면적으로 변화하면서 추상화되어 갔다.
1954년 노샘프턴셔의 코비뉴타운을 위해 시라믹으로 된 추상 벽화를 디자인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칸딘스키의 견해보다는 본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런 평론가들 중에는 추상 미술을 “다소 지루한” 것으로 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Lord Clark of Saltwood, 1903~83)와 E.H. 곰브리치가 있다.
런던 태생의 클라크는 미술사학자, 미술 행정가, 미술품 컬렉터이며 스스로 말한 “나의 부모님은 게으른 부자”로 알려진 상류 계층에 속했다.
그는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는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역사를 공부했다.
1934~45년 런던 내셔날 갤러리의 관장을 역임했고, 1934~44년 영국 왕실의 회화 감독관의 직책을 겸했다.
클라크는 자극적인 작가였으며 세련된 TV 출연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책으로도 출판되고 특히 60개국 이상에서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문명>(1969)을 통해 미술사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풍경에서 미술로 Landscape into Art>(1949), <누드 The Nude>(1956)로 잘 알려져 있듯이 크라크의 주요 저서는 르네상스 미술과 보편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지만, 그는 <헨리 무어의 드로잉 Henry Moore Drawings>(1974)을 비롯하여 20세기 미술에 관한 책도 집필했고, 1943년에 시작된 ‘펭귄 현대 미술가’ 시리즈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추상 미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이를 “다소 단조롭고 허풍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정한 표현”으로서 평가했다.

곰브리치는 1958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존경과 흥미를 강요하는 몬드리안과 니컬슨의 그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게는 진정 즐거움을 주는 칸딘스키의 그림들, 즉 색채 음악 작품들이 존재한다. ...
그러나 내게 무엇인가 의미를 주는 위대한 음악 작품과 최고의 ‘추상’ 회화에 대한 나의 반응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면 추상은 단순한 장식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린다.”

후에 그는 “나는 추상 미술이 종교적인 시대의 미술만큼 훌륭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적 염원의 서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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