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The Birth of Christ(Child of God)> 또한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성서적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왕후>와 마찬가지로 올이 거칠게 짜진 캔버스에 그린 것이다.
이국적 침대에 누워 잠든 여인은 파란 파레우를 걸쳤으며 별 모앙의 금색 무늬가 조금 보인다. 4년 전에 테하마나가 침대에 엎드린 모습을 그린 <저승사자>에서 침대 시트를 밝은 노란색으로 했는데, 여기에서도 레몬 빛 노란색 시트가 시각적으로 강렬하다.
눈길을 끄는 건 누운 여인의 머리 뒤에 <왕후>에서 여인이 들고 있는 부채 모양으로 노란색 후광을 그려 넣은 것이다.
<왕후>와 이 그림에 침대가 사용되었지만 이는 고갱의 회화적 의도에 의한 것으로 타히티인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침대 뒤로 왼쪽에 초록색 후광을 한 신의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 뒤로 파란 의상의 여인이 보이는데 그녀는 초록색 날개를 달고 있어 천사를 표현했음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을 고갱의 딸을 낳은 파후라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파후라는 1896년 말에 딸을 낳았고 신생아는 몇 주 후 사망했다.
이 작품은 고갱이 1896년 7월 파리에서의 전시회를 위해 보낸 작품들 속에 끼어 있었다.
그렇다면 파후라는 그때 임신 중이었다.
파후라가 임신을 하자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으로 자기 자식의 출생을 그리스도의 탄생에 비유한 것이다.
오른편에 가축을 그려 넣어 그리스도의 탄생에 등장하는 상징적 동물들을 대신하고 아이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 넣어 신의 자녀임을 상징한 것이다.
고갱이 타히티 여인을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이었으며 좀 더 사변적이었다.

파리의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지불할 돈을 곧 보내줄 것을 청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주문이 들어왔다.
파페에테 근처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는 변호사 오귀스트 구필이 자신의 딸 잔느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잔느의 타히티 이름은 바이테이다. 1891년에 수잔 뱀브리지와 타히티 여인의 초상을 꽃이 장식된 벽지를 배경으로 그린 적이 있는데 잔느의 초상도 꽃이 그려진 벽지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잔느 구필의 초상 Portrait de Jeune Fille Vaite Goupil>을 보면 잔느가 보통 선교사들이 입는 것에 비해 사이즈가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런 옷에는 무늬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잔느는 단색의 원피스 차림이다.

<잔느 구필의 초상>은 한동안 잊었던 반 고흐에 대한 기억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배경의 벽지를 꽃으로 장식한 그림을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적이 있고 고갱은 그와 함께 지내면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가 보내준 그런 그림을 고갱은 『노아 노아』의 잡록 표지에 수록했습니다.
반 고흐는 1888~89년 룰랭 부인의 초상 <자장가>를 연속적으로 그릴 때 벽지를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다.
<잔느 구필의 초상>은 반 고흐의 <자장가>와 닮은 점이 있는데, 장식적 벽지 외에도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갠 제스처 또한 그렇다.
잔느의 손에는 걸려 있는 가방 끈은 룰랭 부인이 아기의 요람과 연결된 끈을 쥐고 있는 것과 유사다.
고갱이 반 고흐의 그림을 참조하여 구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 Self-Portrait at Near Golgotha>은 파페에테 병원에서 그린 것이다.
1896년 7월에 복사뼈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병원 가운으로 보인다. 배경에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는 여인을 그려 넣어 수도자와도 같은 자신의 모습을 극적으로 강조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남태평양으로 온 것이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며 강제로 구속된 사람처럼 보인다.
스스로 문명사회를 거부했지만 그는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조차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고갱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와 회화에서의 상징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회화는 서술적인 것보다는 암시하는 요소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낯선 이미지들을 창조하며 더러 과격한 장면을 시위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무를 깎아 제작한 작품에서 그런 점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뭐! 질투하니?>, <왜 화가 났니?>, <어디 가니?>, <신비롭게 보이는>, <언제 결혼하세요?> 등 그가 사용한 제목을 보면 반 고흐와는 달리 인생의 문제들을 서술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상징주의 작가들이 소설과 시에서 실험하듯 은유적으로 나타났다.

1896년 여름에서 이듬해 3월 사이에 불과 몇 점밖에 그리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도 있다.
1897년 2월 몽프레에게 작품을 보낸다고 적은 여섯 점 가운데 <왜 화가 났니?>와 <유쾌한 날>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작품의 특징은 주제가 되는 인물이 따로 없고 관련 있는 몇 사람이 있는 풍경을 묘사한 것들이다.

<왜 화가 났니? No te aha oe riri?(Why are You Angry?)>에서는 배경의 야자나무와 화면 앞 풀밭 위에 차가운 느낌을 주는 진한 초록색이 두드러지고 <유쾌한 날>에서는 지면과 인물들의 옷이 다양한 붉은색으로 두드러진다.
두 작품 모두 색의 균형이 완벽하다. <왜 화가 났니?>는 4년 전에 그린 <뭐! 질투하니?>와 <어디 가니?>와 유사한 일상 언어를 제목으로 한 것으로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특징으로 몸도 동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제목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시사하는데, 고갱은 작품을 통해 타히티인이 외적이기보다는 내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을 역설하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왼편 가장자리에 관람자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오른편에 우아한 모습으로 서있는 여인이 “왜 화가 났니?”하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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