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황색 그리스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반 고흐가 1889년 1월 22일에 보내온 편지에 답장하면서 고갱은 물고기로 상징하는 글자 ‘Ictus’를 적어 예술에 있어 자신과 반 고흐가 여전히 형제임을 시사했다.
그는 종이에 수채와 유채를 혼용하고 콜라주를 첨가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Ictus>에도 이 글자를 적었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본 이국적인 조각의 이미지를 이용했는데, 앉아 있는 사람의 포즈는 이집트·그리스·아시아 조각의 요소를 혼용한 합성물의 결과로 그리스도와 이집트인의 신 호루스의 이미지를 융합시킨 것이다.
‘Ictus’는 그리스어 앞 글자들에서 딴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관한 주제로 작품을 제작할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스케치북에는 ‘Ictus’ 외에도 기독교와 관련된 ‘Incas’, ‘Serpent’, ‘Saul’, ‘Paul’, ‘Sain d’Esprit, Saint Esprit’ 등의 글자가 적혀 있다.
반 고흐가 1889년 겨울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Ictus’란 글자를 그림문자 물고기와 함께 적었다.
‘Ictus’는 초대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고갱은 동양 문화에서 감동을 받아 니르바나(열반)의 개념에 기독교와 동양의 종교적 도상을 혼용했다.
그는 동양인처럼 보이는 누드모델을 연꽃과도 같은 제스처를 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오른팔은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으로 왼팔은 부처의 제스처로 각각 상징하면서 기독교를 동양의 상징주의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이런 혼합주의 그림을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이 이미 그리고 있었고 고갱은 르동의 그림에 관해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보이는 것의 논리’를 사용하려는 환상적·상징적 회화 경향으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르동은 쇠라와 함께 1884년에 앙데팡당전의 창설위원이 되었으며, 앙리 팡탱 라투르에게서 석판화 기술을 배워 1879~99년에 <꿈속에서 In the Dream>를 비롯하여 13종의 우수한 석판화집을 발표했다.
르동은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므로 함께 참여한 고갱은 자기보다 여덟 살 연상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은 1889년 9월에 <황색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를 그릴 때 퐁타방 근처 작은 마을 트레말로의 교회에 걸려 있는 17세기에 나무로 제작된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사용했다.
교회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황색이 아니라 아이보리색이지만 벽의 침침한 색으로 인해 노란색처럼 보였다.
그는 예수의 모습을 반자연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배경에 퐁타방의 언덕을 삽입하고 십자가 아래에는 브르통의 의상을 입은 여인들로 구성했다.
이 작품도 <설교 후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공간이 시각적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초자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브르통 여인의 모습이 화면 왼편 가장자리에서 잘렸다.
두 작품 모두 은유적인 영상으로 나타나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시골뜨기 브르통 여인들이 사모하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화면 상단을 가로지른 십자가는 초자연적 분위기를 창출하며 노란색의 그리스도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이미지이다.
<황색 그리스도>에 관해 피사로가 말했다.
내게 있어 고갱의 작품이 비난받는 이유는 그의 추상이 근래 우리의 철학·사회적·반권위적·반신비적인 점들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한 발 후퇴한 것이다.
고갱은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못된다.
그는 그저 교활한 자일뿐이다.
고갱은 1889년 가을에 다시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푸른 그리스도 Green Christ>이다.
이것을 <브르통 골고다>라고도 한다.
<황색 그리스도>에서 출발한 고갱의 추상은 색을 평편하게 하고, 전체적 구성을 단순화하며, 구체적 요소들을 생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 몸의 윤곽을 푸른색으로 칠하면서 입체감을 느낄 수 없도록 평편하게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앞으로 다가서는 느낌이다.
이 작품도 브르통의 기독교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는 니종에 있는 조그만 교회 앞마당에서 돌로 제작된 골고다 조각을 보았다.
골고다 조각은 수직으로 된 것으로 양 날개에는 성 베드로와 성 요한이 있고 그 아래 그 밖의 제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맨 위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있지만 고갱은 하단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세 여인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니종의 교회가 마음에 들었으며, 1888년 가을에 그린 <설교 후의 영상>을 이 교회에 장식했으면 하고 희망을 전한 적이 있다.
브르통 주민의 원시적 종교생활에 어울리는 원시적 형태의 성상을 창조한 것이다.
고갱은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배경에 오른편에 삽입된 것은 그해 봄에 제작한 도자기 <자화상 컵 Self-Portrait Mug>이다.
그는 도자기를 “야만인 고갱의 머리”라고 했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본 자바인의 조각과 소아시아인의 테라코타 마스크를 응용했다.
고갱의 놀라운 점은 고대 조각가들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모습을 제작한 것이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을 통해서 고갱은 자신을 기독교와 비기독교 세계의 중재자로 부각시켰다.
고갱은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자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으며 이런 심리적 억압을 나타낸 것이 피를 흘리는 자신의 얼굴을 묘사한 <자화상 화병 Self-Portrait Vase>이다.
그는 자화상 화병을 <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에 삽입하여 회화적으로 중요한 오브제가 되게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회화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사용하곤 했다.
고갱은 1889년 중반에 양손을 얼굴에 대고 고뇌하며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브르통 이브 The Breton Eve>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림의 배경은 르 풀뒤의 해변이다.
<브르통 이브>는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 Grape Harvest at Arles(Human Anguish)>과 유사하다.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의 원제는 <포도 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다.
결이 고운 캔버스가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을 칠해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 거친 질감을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았다.
그는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 iseres humaines>를 수채화로 그리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 Femmes se Baignant>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그는 페루의 미라를 여러 차례에 걸쳐 드로잉 했는데, 이런 모습을 그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에서 선보였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화가들도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는 고갱의 <검은 바위 The Black Rocks>가 장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