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귓불을 자른 반 고흐>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몇 점 팔았지만 아를에서의 생활에는 진력을 냈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반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불상사를 일으키기 전날 밤인 12월 23일에 테오에게 적었다.

고갱은 아를이라는 훌륭한 도시, 우리가 작업하는 작은 노란 집, 무엇보다도 내게 약간 싫증이 난 것 같구나.
사실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는 질리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물론 그 원인은 우리들 자신들에게 있다고 해야겠지.
말하자면 그는 그냥 떠나버리거나 머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에게 결정을 하기 전 깊이 생각해보라고, 또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라고 말해주었다.

고갱은 매우 강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친구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에게는 평화로운 환경이 필요하구나.
그가 여기서 평화를 얻지 못하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이냐?
묵묵히 그의 결정을 기다리려고 한다.

고갱은 12월 23일 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노란 집을 나섰는데 귀에 익은 발자국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을 알았다.
훗날 고갱의 말에 의하면 빅토르 위고 광장의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뒤를 돌아보니 제정신이 아닌 듯 반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서있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반 고흐는 비밀이 탄로 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노란 집 쪽으로 달아났다.
고갱은 너무 놀랐으며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날 밤 노란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에서 묵었다.

이튿날 아침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깬 고갱은 지난 밤 반 고흐가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자른 것을 알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귀를 싸맨 반 고흐를 목격하고 반 고흐가 귓불을 잘라 그것을 라셀이라는 매춘부에게 “이것을 잘 간수해” 하며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셀이 장난삼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귓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반 고흐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귓불을 자른 것이다.

반 고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피를 너무 흘렀기 때문이다.
길에 쓰러져 있는 그를 경찰관이 디에우 병원으로 운반했으며 닥터 펠릭스 레가 치료했다.
고갱은 테오에게 연락했고 테오는 서둘러 내려와 형을 아를 시립병원 독방에 입원(감금)시켰다. 반 고흐가 고갱을 찾았을 때 고갱은 아를을 떠난 후였다.
반 고흐는 12월 27일에 정신질환을 일으켰다. 테오와 닥터 펠릭스 레는 반 고흐를 엑상프로방스의 정신병원으로 옮기는 문제에 관해 의논하고, 결국 반 고흐는 1889년 5월 8일에 아를에서 북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생레미의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는 요양원에 일 년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네 차례에 걸쳐서 발작을 일으켰다.
반 고흐가 파리로 돌아온 건 1890년 5월 17일이었다.
그는 오베르에서 지내다가 1890년 7월 27일에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고 29일 새벽 1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테오는 약 7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은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반 고흐와 나란히 묻혔다.


반 고흐가 귓불을 자른 사건은 파리 화단에 곧 알려졌고 전하는 사람마다 내용을 달리 해서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오늘날 의학명으로 말하면 반 고흐는 간질을 앓았다.
알코올중독과 매독, 그리고 독성 있는 물감을 삼키는 버릇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발작의 주요 원인은 간질이었다.

반 고흐가 자살하자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매우 컸으며 사람들은 아를에서의 고갱의 과실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에 대한 친구로서의 고갱의 행위가 옳지 않았다는 말이 유포되었다.
고갱은 침묵했지만 말년에 그날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고갱의 입장에서 기억을 되살려 한 해명이다.

물론 우연이기는 하나 나와 교제하거나 의견을 나눴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소수가 정신병에 걸렸다.
반 고흐 형제가 그들이다.
어떤 자들은 악의에 차서, 또 어떤 자들은 악의 없이 그들의 발작을 내 탓으로 돌렸다.
한 인간이 그 친구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발작하게 만든다는 따위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내가 아를에 도착할 무렵 빈센트는 자아에 직면하고 있었다.
나는 연장자이기는 하나 고갈된 인간이었다.
나 역시 빈센트에게 어떤 힘을 취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식에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에 관한 나의 견해를 한층 굳힌 일이고, 또 곤란할 때는 누구든지 자기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고갱의 데생은 얼마쯤 반 고흐의 것을 상기시킨다”는 문장을 읽을 때면 난 미소를 짓는다.
저녁때가 돼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홀로 만발한 월계수의 향기를 맡으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 빅토르 위고 과장을 거의 벗어날 때였다.
귀에 익은 종종걸음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본 순간 빈센트는 날이 선 면도칼을 손에 들고 바싹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 내 눈길은 너무도 매서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우뚝 멈춰 서서 얼굴을 가리더니 집 쪽으로 달아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때 내가 비겁했던 것일까?
그 순간 그의 칼을 빼앗고 애써 그를 진정시켜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종종 양심에 묻지만 나 자신을 비난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내게 돌을 던질 자는 던져라.
그 길로 아를의 훌륭한 호텔로 가서 시간을 물은 뒤 빈방을 부탁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놀라서 새벽 세 시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꽤 늦게 일곱 시 반경에 눈을 떴다.
광장까지 오니 군중이 모여 있었다.
집 옆에는 몇 명의 헌병과 중산모자를 쓴 키 작은 경위가 서있었다.
집 입구에 올 때까지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빈센트는 침대에서 모포를 푹 뒤집어쓰고 방아쇠 모양으로 웅크리고 누워서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아주 살며시 그의 몸에 손을 대보았는데 온기는 분명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내게 모든 지성과 정력을 되돌려주는 그런 것이었다.
난 나직이 경위에게 말했다.
“제발 아주 조심해서 일으켜주시오. 날 찾거들랑 파리로 떠났다고 말해주시오. 날 보기가 괴로울 테니까요.”
...
그 뒤의 사정은 이 일에 흥미 있는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신병원에 들어가 몇 개월의 간격을 두고는 이성을 되찾아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세상이 다 아는 저 경탄할 만한 몇 점의 작품을 폭풍처럼 그려낸 한 인간의 끝없는 고통만은 말해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받은 편지에는 퐁투아즈에서 가까운 오베르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깨끗이 나아서 나를 다시 만나러 브르타뉴로 오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회복이 불가능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선생님(전에는 날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선생님께 이렇게 심려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혼란스럽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죽는 게 품위를 지키는 길이겠지요.”
빈센트는 자기 배에 권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몇 시간 동안 파이프 담배를 피웠고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누구도 원망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장 돌랑Jean Dolent은 『괴물들 Monstres』에 이렇게 적었다.

“고갱이 반 고흐에 관해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다.”

그는 자세한 진상을 모르고 짐작으로 썼겠지만 그의 말은 옳았다.
그 이유는 독자들도 잘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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