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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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제7장 팝아트와 지나간 미래

제7장 앞부분에 2차세계대전 전후의 미국 미술 계보가 나온다.
특히 토마스 이킨스, 로버트 헨리,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이 나온다.
헨리는 이킨스의 제자였고, 호퍼는 헨리의 제자로서 미국 미술의 직선적 계보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부의 미술과 뉴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동부의 미술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 미술의 주류는 주로 동부에서 이루어졌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부에서 볼 때 서부의 미술은 비주류로 보인다.
앞에 언급한 세 화가들은 미국 전통회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를 앞세우고 몰려드는 유럽의 현대 회화로부터 자신들의 고유한 지역 회화를 지키고 미국식 회화의 장점을 알리려고 했다.

파리 아카데미 보자르에 유학했던 이킨스, Ash Can School을 창설한 헨리, 호퍼 모두 유럽 화가들이 여자의 누드를 그릴 때 프리네스, 비너스, 님프, 헤르마프로디테, 하우리 등으로 불릴 만한 이상화된 누드의 모습을 그린 것에 반대하면서 평범한 여인이 지금 막 옷을 벗었을 때의 실재 모습을 그렸다.
화가가 연출한 에로틱한 상황에서 몽상에 잠긴 여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옷을 벗은 여인을 그렸다.
미국 화가들의 그림이 모던하게 보이지 않고 19세기 후반의 그림으로 보였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단토는 1933년경의 미국의 모더니즘 회화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0년경에 발표한 <모더니스트 회화>와는 크게 달랐던 점을 지적했는데 그 당시 모더니즘이 거의 종료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1933년 당시의 시각에서 본 '모던'은 다양한 미술을 용인했는데,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여기에 앙리 루소의 환상의 세계,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추상과 절대주의, 비구성도 포함되었다.
주지할 점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주류 화가들은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면서 모더니티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그는 예쁜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영화 연출가가 배우에게 주문하듯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의 그림은 주로 소외된 인간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야의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넣는 늙은 주유소 주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이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등이다.
이런 사실주의 그림은 그 자체 훌륭했지만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자 추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는 협소하게 정의된 모더니즘 이론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 전통주의 화가의 입지가 갑자기 좁아진 것이다.
호퍼를 비롯한 그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k"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사실에 경악해 했다.
구상과 비구상의 반목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단토는 당시의 추상과 사실주의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관여했는지 의구심을 표한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히 화형감이었을 정도로 심했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의 이단적 행위로 보일 정도였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보다 더욱 더 심했다고 보면 된다.
대학의 교수들은 사실주의에 관한 강의계획서를 제출했다간 강의가 배정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미국 미술계에서 그린버그의 영향을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는 그에 의해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으로 보았다.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단토는 문제 삼는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회화의 양식에 속하는 것이지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쁜 것의 차이도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제7장의 제목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지적한 말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넣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예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회화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 미술의 상황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그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팝아트는 1960년대 초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는데, 그가 부지불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흘리기와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가 1964년이었다.

한편 1964년 휘트니 뮤지엄이 호퍼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이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회화를 옹호하고 추상에 대해 끈질지게 투쟁한 노력의 댓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뮤지엄 앞에서 피켓을 들고 뮤지엄이 추상만을 선호하는 데 반대시위를 했고 일간신문 뉴욕타임즈에 추상표현주의를 공격하는 글을 쓰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해 왔었다.
호퍼의 회고전은 이런 의미에서 사실주의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
그때 막 성행하기 시작한 포토리얼리즘 운동도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옹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추상표현주의자들 중에도 호퍼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사람이 있었는데 폴록과 단짝이었던 드 쿠닝이 호감을 나타냈다.
드 쿠닝은 사람과 사물의 형상을 그렸다는 이유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폴록은 드 쿠닝에게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너 구상을 하고 있잖아. 아직도 똑같이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다니. 너는 구상화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드 쿠닝이 회화에 있어서 추상적 혁명의 배신자로 몰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저서 <폴록과 친구들>에 소상히 나와 있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그의 논리적 이야기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었던 그가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올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 가서 엔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았을 때 큰 자극을 받은 건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뉴욕 미술의 장면을 정의하고 있던 논쟁의 전체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철학회에서 미학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는 <예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는 미술을 다루는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예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왔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예술가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과 실재 사이의 차이를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들을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워홀과 팝아트 예술가들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을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에 의한 미술사 구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 이전에 미술잡지 <네이션>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이란 말이 썩 좋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러한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구분을 첨가하고자 했는데 다음과 같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에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이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들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단토는 변용에 관해 언급했는데 이는 이선종님의 질문에 답할 때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삼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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