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레싱에 의해 시각예술과 언어예술 간의 차이가
보상케는 『라오콘』에 나타난 레싱의 현안들이 다양한 출처에서 수집된 것들이라면서 “기호로서 언어의 개념을 표시한 것에 대한 기호들의 편리한 관계”는 바움가르텐이 시사한 것이며,
시가 시각적 본체들의 완전한 설명에 적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버크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고,
회화가 오직 한 순간만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카임스Lord Kaimes의 『비평의 요소들 Elements of Criticism』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지적했으며,
시가 본질적으로 행위를 다룬다는 근원적인 개념은 의심의 여지없이 시에 핵심이 되는 드라마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이에 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한 스위스의 평론가이면서 시인들 보드머Bodmer와 브라이팅거Breitinger의 언급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질료적 혹은 몸체적 미가 다양한 형태 안에서 순수한 통합으로 구성된다는 개념은 호가드W. Hogarth(1697-1764)와 고전미학과 빙켈만의 우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반영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레싱 이전의 어느 누구도 이런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논의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28-2)
괴테는 레싱에 의해 “시각예술과 언어예술 간의 차이가 분명해졌다”고 했다.29)
멘델스존은 『고찰 Betrachtungen』(1757)에서 두 종류의 예술은 차이가 있지만 유사성도 있기 때문에 모든 예술을 균일하게 취급하자고 했고, 줄쩌는 『순수예술에 관한 일반이론 Allgemeine Theorie der Schonen Kunste』(1771-74)에서 멘델스존의 주장을 현실화하려고 했다.
괴테는 줄쩌의 저서에 대한 서평에서 그토록 다양한 것들을 통일시키자는 견해를 비웃었다.30)
빙켈만J. J. Winckelmann(1717-68)은 미는 규칙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합법칙적 본질이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의 작용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게 되는 자연이 지닌 위대한 신비와 본질 중 하나다.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판명한 개념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 속에 있다”31)고 보았는데,
레싱은 모든 예술이 관련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피상적이고 김을 빼는 유추들에 공격을 가했다.
빙켈만이 고대 전체에 대한 열망 속에서 받아들였던 것 즉 이념적인 위대함을 레싱은 조형미술에 제한하면서 이를 특수한 장르의 원리로 입증했다.
고대의 라오콘 상에 대한 당시의 유명한 논쟁에서 레싱은 빙켈만의 견해에 반대했는데, 빙켈만은 베르길리우스Vergil의 시 속에서 라오콘이 비명을 지를 수도 있었다는 이유에서 베르길리우스를 비판하였다.
레싱은 이런 일은 문학적 장르의 영향법칙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역설했다.
후에 유스티Justi는 그 논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래서 레싱은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빙켈만적 이념을 위해 그 이념의 창시자에게는 낯선 기초를 놓으려 한 것이다.
이런 기초를 무조건 요구하는 것은 회화와 조각에 제한되었다.”32)
레싱은 자신의 시에서도 예술과 활동의 과정에 관해 언급했는데 <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 제1막에서 화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예술은, 조형적인 자연이 그러하듯이 - 만약 있기만 하다면 - 상을 그려야 한다.
저항하는 소재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타락도 없이.
그리고 시간이 그에 대항해 싸우는 파멸도 없이.33)
레싱은 회화와 시 자체의 구분되는 매체들 안에서 그것들의 특정적이며 개별적인 가능성들과 가치들을 모색했다.
한 예술의 매체를 그는 ‘부호 Zeichen’로 부르면서 그것이 모방을 위해 사용된다고 했다.
회화와 시의 모방 가능성들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그것들이 과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회화는 형태와 색을 나란히 일관하는 데서 오브제들과 가시적 특성들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으며, 행위들은 간접적으로 밖에는 시사할 수 없는 반면, 시는 이와 정반대였다.
예술의 두 번째 되는 강력한 것이 으뜸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그것이 최고의 작품일 수 없었다.
문학과 미술에 관한 레싱의 저서들은 미적 경험에 관해 충분한 분석과 비평을 결여했지만 예술가로 하여금 모든 제한된 규정들과 예술적 형식에 구애되는 관습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주었다.
레싱 자신은 낭만주의 작가가 아니었지만 그가 추구한 자연적인 느낌들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과 고대에 대한 회고적인 관심이 독일 낭만주의가 형성되는 데 크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