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7

 

 데 스테일은 1920년대에 운동의 범위가 어느 정도 확대되면서 초기의 엄격성을 상실했다. 몬드리안이 인간의 정신성을 개혁하기 위한 신조형 회화의 유토피아적 기능을 예언적인 비전으로 나타낸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점차적으로 건축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실제적인 개혁으로 관심을 돌렸다. 1921년경부터 반 두스뷔르흐는 다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1922년 <메카노 Mecano>라는 이름으로 <데 스테일>의 다다 부록판을 출간했다. 1924년부터 그는 초기의 신조형주의 원리를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요소주의는 조형주의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적용에 대한 수정이며 그것의 논리적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직선과 직각으로 엄격하게 제한시키기는 하지만 그는 이제 수직, 수평을 거부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역동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허버트 리드는 추상 미술의 가장 심오한 선구자들은 대부분 “형이상학적으로 고뇌하는 민족인 러시아인, 독일인, 네덜라드인”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예술가들에게 추상은 단순히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표현법을 발견하는 문제였다.

몬드리안, 반 두스뷔르흐, 칸딘스키, 말레비치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추상의 선구자들로 모두 미술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칸딘스키는 회화는 자유롭게 흐르고 감성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과 반 두스뷔르흐의 회화는 엄격하게 기하적 추상으로, 이들의 회화는 추상의 가상적 대극점에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신지학의 영향을 받았다. 신지학은 1875년 뉴욕에서의 신지학 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현대적 제의가 된 고대의 철학 체계이다. 신지학자들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믿었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혼돈의 근저에는 깊은 조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그들의 사상은, 자신들의 회화가 유물주의적인 서구 세계에 정신의 부흥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추상 미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설명을 공식화하면서 예술가가 외관이라는 바깥 껍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보는 자의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을 색채로 보았는데, 이는 색채가 “정신적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울림”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신지학 책에 실린 보다 높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동반되는 채색 삽화들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애니 베선트와 C.W. 리드베터가 저술한 <생각의 형상들 Thought Forms>(1905)이 있는데, 구름과 비슷한 형상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의 독일어판이 1908년에 발간되었고 칸딘스키는 이것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안은 1909년에 신지학 협회의 일원이 되었고 평생 동안 회원으로 활동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몬드리안도 추상 미술이 외관을 관통하여 그 아래에 있는 더 큰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명확하고 균형 잡힌 자신의 미술이 우주적인 시각적 조화가 삶을 지배하는 사회에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다.

일반적으로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는 구상 미술이 지배적이었고 추상 미술은 대중적으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추상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성하게 성행했는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로 유럽에서는 앵포르멜로 나타났다. 1960년경 추상 미술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서양 미술의 지배적인 정통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도 그 접근에 있어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은 고매한 정신을 가졌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행했던 것과 같은 철학적 정당화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추상 예술가들이 나치 독일과 소련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금지했던 전체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때로는 추상 미술에 서구의 사상적 자유의 화신이라는 도덕적인 차원이 부여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런 억압의 공포를 피해 뉴욕으로 탈출한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미국에서 추상 미술을 지원한 것은 거의 애국심의 한 형태로 생각되었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적 유형의 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운동에 관한 권위 있는 저서들 중 하나인 어빙 샌들러의 <추상 표현주의>(1970)에는 ‘미국 회화의 승리 The Triumph of American Painting’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추상 표현주의는 미술에 있어서 위대한 분기점을 의미하며, 이후의 많은 발전은 추상 표현주의로부터의 진화이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반동이었다. 여기에는 특별히 팝 아트의 형식으로 대표되는 구상의 부활도 포함되지만 1960년대를 풍미했던 후기 회화적 추상, 옵 아트, 미니멀 아트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추상도 포함된다.

추상 미술의 몇몇 대표자들과 지지자들은 추상이 과거의 가장 위대한 미술과 같은 높은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는 “삼각형의 날카로운 각이 원에 닿을 때의 충격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신의 손가락이 아담의 손가락에 닿는 장면 못지 않는 강렬한 효과를 낸다”라고 적었다. 키스 본Keith Vaughan(1912~77)은 칸딘스키의 그런 언급에 대해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간결하게 응답했다. 서식스의 셀시힐 태생의 본은 거의 독학으로 회화를 배웠으므로 1940년대 중반까지 영국 회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1946년부터 캠버웰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본의 1950년대 그림은 드 스탈의 방식으로 점차 평면적으로 변화하면서 추상화되어 갔다. 1954년 노샘프턴셔의 코비뉴타운을 위해 시라믹으로 된 추상 벽화를 디자인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칸딘스키의 견해보다는 본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런 평론가들 중에는 추상 미술을 “다소 지루한” 것으로 본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Lord Clark of Saltwood, 1903~83)와 E.H. 곰브리치가 있다. 런던 태생의 클라크는 미술사학자, 미술 행정가, 미술품 컬렉터이며 스스로 말한 “나의 부모님은 게으른 부자”로 알려진 상류 계층에 속했다. 그는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는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역사를 공부했다. 1934~45년 런던 내셔날 갤러리의 관장을 역임했고, 1934~44년 영국 왕실의 회화 감독관의 직책을 겸했다. 클라크는 자극적인 작가였으며 세련된 TV 출연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책으로도 출판되고 특히 60개국 이상에서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문명>(1969)을 통해 미술사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풍경에서 미술로 Landscape into Art>(1949), <누드 The Nude>(1956)로 잘 알려져 있듯이 크라크의 주요 저서는 르네상스 미술과 보편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지만, 그는 <헨리 무어의 드로잉 Henry Moore Drawings>(1974)을 비롯하여 20세기 미술에 관한 책도 집필했고, 1943년에 시작된 ‘펭귄 현대 미술가’ 시리즈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추상 미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이를 “다소 단조롭고 허풍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정한 표현”으로서 평가했다.

곰브리치는 1958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존경과 흥미를 강요하는 몬드리안과 니컬슨의 그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게는 진정 즐거움을 주는 칸딘스키의 그림들, 즉 색채 음악 작품들이 존재한다. ... 그러나 내게 무엇인가 의미를 주는 위대한 음악 작품과 최고의 ‘추상’ 회화에 대한 나의 반응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면 추상은 단순한 장식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린다.” 후에 그는 “나는 추상 미술이 종교적인 시대의 미술만큼 훌륭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적 염원의 서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다”고 덧붙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