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6
한편 러시아에서 추상 미술이 번성했는데, 절대주의 외에도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광선주의Rayonism가 1915년에 시작되었다. 유럽 구성주의는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여 그 의미가 모호한 데 반해 러시아 구성주의는 매우 구체적인 명칭이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리시츠키만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 모두 동조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 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란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이런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 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페브스네르 형제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선주의는 러시아 화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행한 회화 양식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라리오노프가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언문으로 시작되었고, 이 선언문은 191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표적’ 전시회에 맞추어 발행된 문집에 실렸다. 선언문에 따르면 광선주의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즘의 종합이었다. 광선주의 양식은 물체에서 발산되며 가까이 있는 다른 물체에 의해 차단당하기도 하는 보이지 않는 광선에 대한 불분명한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 광선은 어떤 점에서 이탈리아 미래주의 이론에서 요구되던 ‘힘의 선’과 유사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미적 목적에 맞는 형태를 창조하기 위해 이런 광선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물체에서 발산되는 광선은 다른 물체로 건너가면서 광선주의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예술가는 이것을 자신의 미적 표현 욕구에 맞게 구부리고 굴복시켜 형태를 변화시킨다.” 많은 광선주의 회화가 특히 일단의 대각선으로 주제의 해체를 강조한 점에서 미래주의 작품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인다. 광선주의 운동은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가 1914년 이후 이젤화를 그만두면서 급속히 종결되었다.
추상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명 내지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일부 예술가들은 거의 종교를 향한 것과 같은 열정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했으며, 1917년에 창립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그룹의 예술가들도 이와 유사했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고,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조직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 두스뷔르흐 외에 창립에 참여한 인물로는 화가 피트 몬드리안, 빌모시 후사르, 시인 안토니 콕크, 건축가 야코부스 요하네스 피테르 오우트Jacobus Johannes Pieter Oud(1890~1963)가 있다. 정기 간행물 <데 스테일>은 반 두스뷔르흐와 동료들의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미술은 혁신적이면서도 자기 만족적이며 새로운 미학적 신조를 포함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반 대중에게 이런 신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간행물의 목적은 이런 새로운 미학의 표출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그것이 추구하는 미의 종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수 조형적 작품을 만들고 이를 대중에게 홍보했다.
그들이 선언한 미적 신조와 미술 양식은 새로운 조형주의, 혹은 신조형주의로 알려졌다. 이는 극단적인 미적 엄격성을 특징으로 하며 재현을 전적으로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표현적 요소들을 직선, 직각과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 및 흰색,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으로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런 엄격한 예술적 금욕성은 신비적인 색채를 띤 철학이나 미학과 관련되어 부과되었다. 이런 철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상황에 반발하며 형성되었다. 시대의 불행은 널리 퍼진 개인주의의 결과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삶의 모든 단계를 집단화하고 비개성화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따라서 완벽한 정확함에 대한 추상적인 이상을 지닌 기계 기술은 장인의 솜씨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주관적인 표현은 예술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다. 윤리적인 면에서 몬드리안은 주관적인 개인주의는 모든 단계에서 보편적인 조화에 대한 추상적 이상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보편적인 조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 예술이 미래의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개념에 따라 데 스테일의 추종자들은 좁은 의미의 예술관을 피력했는데, 즉 미술에서 구상적 요소를 제거하고 시조형주의의 미학적인 엄격함을 추구함으로써 시각 예술을 주관적인 감정에 대한 의존과 자연 대상물의 재현에 내재한 가치 체계로부터 해방시켜 예술에 자유를 부여하고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 점차 추상적인 진리의 본질적 원리에 대한 표명으로 옮겨 갔던 하나의 역사적인 과정에서 볼 때 예술의 정화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