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2

 

러시아 화가 카시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Kar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1905년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 인상주의’라 불린 양식에 있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복제품과 시추킨, 모로조프 컬렉션을 통해 보나르, 뷔야르, 세잔, 레제를 비롯한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작품을 접했다. 1908년경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와 교류하면서 말레비치의 양식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1898년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 곤차로바는 러시아 농촌 미술과 중세 성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시기 그녀의 회화 작품에서 세련된 원시주의가 나타난 것도 이런 관심의 영향이었다. 1908년 군대에 징집될 때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 학교에서 공부한 라리오노프는 많은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화가였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기 인상주의를 러시아풍으로 해석한 작품을 그린 그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에 아내가 된 곤차로바와 함께 러시아 민속 미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세련된 원시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의 양식이 곤차로바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1914년 곤차로바와 함께 파리의 폴 기욤 화랑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15년 곤차로바와 함께 다시 파리로 와서 정착했다. 이후 그는 사실상 이젤화를 그만두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에 열중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시골 농부들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전의 세련된 기교 대신 의도적으로 원시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입체주의 기법에 깊이 몰두했는데, 농부들을 그린 많은 작품에서 인물들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나고, 형상과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인 색채의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그림에서 모티프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욱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적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한 말레비치는 이 양식을 입체-미래주의라고 명명했다. 입체-미래주의의 뒤를 이어 1913년과 1914년에는 또 다른 급격한 양식의 변화를 이루었다. 즉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따라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콜라주를 통해 그림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말레비치는 비구상 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15년 12월 절대주의 회화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절대주의가 분석적 입체주의나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직접 발전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입체주의는 세잔의 권고에 따라 자연의 현상을 기하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분해한 것인데 반해, 절대주의는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서, 보이는 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기하적 추상 형태로 그림을 구성해나갔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bjective World>에 수록된 논문 ‘절대주의 Suprematism’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한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혹은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미적 정서’라 불리는 감정의 순수한 표현이라고 묘사했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들은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는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한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1917~18년의 그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연작으로 절정에 도달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이다. 앨프레드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에서, 20세기 미술사에서 말레비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추상 미술의 역사에서 말레비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구자, 이론가이며 예술가로서, 러시아의 많은 추종자들뿐 아니라 리시츠키와 모홀리-나기를 통해, 중부 유럽의 추상 미술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휩쓸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네덜란드 데 스테일의 영향력과 결합하여 독일과 나머지 유럽 대부분의 건축, 가구, 인쇄, 상업 미술에 변혁을 가져온 추상 미술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모스크바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3년 모교의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895년 러시아에서 처음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1897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Phalanx라는 아방가르드 전시 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는 1909년에 뮌헨 신예술가 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한편 그는 하계 예술가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는데, 이 모임은 뮌헨 교외 무르나우에 있는, 칸딘스키의 정부인 가브리엘레 뮌터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에는 러시아 화가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을 비롯하여 독일의 젊은 화가인 프라츠 마르크와 아우구스트 마케가 참여했다. 이들은 1911년 말 뮌헨 신예술가 협회에서 탈퇴한 분리 그룹의 핵심 인물들로,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청기사) 그룹을 결성했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insbesondere in der Maleret>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갔고 1921년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어 1933년 폐교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1924년 클레, 야블렌스키, 파이닝거와 함께 블라우엔 피어Die Blauen Vier를 결성했으며 1927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블라우엔 피어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4인방이라는 의미로 블라우에 라이터를 계승하여 결성한 모임이다. 칸딘스키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이 1926년 바우하우스 총서로 출간되었다. 1933년 바우하우스가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파리로 가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작품들은 1937년 뮌헨에서 나치의 기획으로 개최된 퇴폐 미술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1939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칸딘스키는 비구상적인 추상을 향해 나아갔는데, 이는 미술의 본질을 ‘비대상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철학적 관점의 전개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시기의 추상 회화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초기의 완전히 비재현적인 과슈 작품들은 보통 1910년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시기를 1913년으로 늦추어 추정하기도 한다. 바우하우스 시기의 추상화는 기하적 추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표현주의 미술에 속했고 뮌헨 시기의 낭만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좀더 계획적으로 구상되었으며 형태의 기하적 성격은 더욱 명확해졌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이론적이며 교육적인 저술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화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자연의 사물이나 광경의 표현적인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미술 재료 특히 물감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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