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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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그리고 나폴레옹과 다비드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사학자들은 시민들이 루이 16세의 개혁정치를 무시한 채 폭동을 일으켜 바스티유를 습격한 시점부터 프랑스 혁명의 대단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은 어느 날의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한 사건이 촉발되려면 이전에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루이 16세는 개혁의 여건을 마련한 사람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왕실은 재정적자의 위기에 놓여 있었고 외국의 침략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직전에 있었다.
그는 외국인 재무장관을 고용해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폈으며 솔선해서 농노를 해방했다.
시민 모두 교육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했으며, 귀족의 만행을 저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세금을 낮추고 정부의 적자를 부자들에게 떠맡기려고 했다.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이는 바람직한 개혁정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시민이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부르주아였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전유한 교육제도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계층도 정치적·경제적 파탄의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자연히 그들은 모두 루이 16세를 공격하게 되었고 모든 책임을 군주제에 돌리며, 루이 16세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프랑스 시민 다수의 의견이 아닌,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혁명이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후에도 왕당파가 오래 잔존하고,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폭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대다수의 시민이 군주제의 말살을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여기에 지식인 계급이 합세하여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목적을 은폐하고 표면적인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을 내세워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 뜻을 모아 일으킨 혁명이었으므로 루이 16세 처형 후 프랑스는 오랫동안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각계각층이 충돌했고, 이념과 정치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해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고 살해하는 공포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여기저기 단두대를 세우고 정적들을 처형하는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 역시 이념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다.
그는 쉽게 쿠데타에 성공했고 제1통령이 되었으며 결국 왕정보다 더 독재적인 황제의 자리를 굳혔다.

나폴레옹은 평민출신이라서 과거 왕실과는 달리 많은 왕족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외국의 침략을 막고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영토 확장 정책을 썼다.
유럽의 모든 군주제 국가들은 자연히 합세해서 대프랑스 연합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재위기간의 3분의 2를 프랑스를 떠나 전장에서 보냈다.
그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법을 제정했는데, 나폴레옹 법전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매우 진보된 법이었다.
그가 프랑스 혁명의 결실을 이룩한 것이다.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영향력은 대폭 줄었고 대신 군인들이 정치에 나섰다.
군대가 부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부패에 비하면 약과였다.
시민들은 전적으로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그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마치 유럽 전체에 대한 혁명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점령지에 군주제를 심었지만 군주의 일반적인 통치가 아니라 시민대표들로 구성한 시의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는 형제들을 점령국가의 왕위에 앉혔지만 이는 상징적인 통치수단이었고 자국민의 의견을 수렴했다.
유럽의 세습 군주들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래된 군주제 전통이 그에 의해 와해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을 나폴레옹의 몰락까지로 보는 이유는 이런 세습 군주제의 폐지를 혁명의 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늦게 자식을 낳았고 (로마 왕, 나폴레옹 2세) 세습시킬 여건을 만들지 못한 채 몰락했지만, 그도 왕위를 세습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을 혁명의 완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고 독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다만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시민의 권리와 영향력이 커진 것이 사실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공은 매우 크다.

다비드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 기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도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틈타 혁명의 기류에 편승하여 영광을 누렸다.
그가 그린 프로파간다 그림들이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의 손에서 맹목적인 국수주의가 꽃피었고, 나폴레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거쳐 칭송받는 영웅이 되었다.
미학적으로 보면 타락한 한 예술가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푸생 이후의 프랑스 전통을 이은 훌륭한 화가였다.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서 시작된 신고전주의는 다비드에 의해 꽃피울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놓고 보면 다비드야말로 미술사에 획을 그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을 쓰면서 프랑스 혁명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혁명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기간도 나폴레옹의 몰락까지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은 명료하게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격변기에 한 시대를 풍미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투쟁하고 성취했지만 역사책에서는 칭송을 받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에 끼친 민주주의의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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