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집안 이야기


1345년 친토 브란디니와 아홉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막노동을 하는 자들로 단체를 결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368년에는 소시민들이 혁명을 시도했지만 진압되었다.
십 년 후에는 촘피반란tumulto dei Ciompi(모직에 보플을 일으키는 직공들의 반란)이 미첼레 디 란도에 의해 일어났고 그는 프로레타리아 단체를 결성한 후 단체의 결성을 금하는 법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1382년 무력으로 이 반란도 진압되었다.
피렌체는 촘피반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대시민들이 다시금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시그노리아Signoria를 결성했는데 시그노리signori(혹은 젠틀맨) 8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로 시그노리는 길드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제비뽑기식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8명 가운데 4명은 반드시 대길드 출신이어야 했고 나머지 4명은 소길드 출신이었다.
이들 8명이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정의의 기수 gonfaloniere di giustizia"로 선출했는데 달리 말하면 법집행관이다.
21개의 길드 가운데서 대길드에서 4명, 소길드에서 4명을 각각 선출하여 자문위원회인 시의회Consiglio del Popplp를 결성했다.
그리고 모든 길드 멤버들로 코뮌회Consiglio del Comune가 구성되었으며 3천 명에 이르는 이들에게는 8명으로 구성된 시그노리 최고위원회가 제출한 안건에 대해 찬반 투표밖에 할 수 없었다.

종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은 정치권력이 전체 시민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몇몇 부유한 집안에 의해서 행사되고 또한 그들이 장악한 권력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동안 이들 부호계급은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혁명적 운동으로 간주되는 일체의 정치적 운동을 지체 없이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진압했다.
3천 명의 상업계층 사람들이 8명의 시그노리들에게 도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메디치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인물은 1201년 코뮌 회의의 멤버 치아리시모 데 메디치이다.
메디치란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사란 뜻의 이 말과 메디치가가 한때 메디컬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들어 조상이 의사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윌 두란트 같은 저명한 학자는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본다.
코시모의 고조할아버지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는 대담한 사업과 명민한 재정관리로 큰 돈을 벌었으며 1314년에 도시장관gonfaloniere에 기용되었다.
1378년에는 아베라르도의 손주조카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도시장관에 기용되어 가문을 빛냈으며 살베스트로의 손주조카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421년에 도시장관애 기용되어 메디치가를 사람들의 사랑받는 가문이 되게 만들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1428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코시모에게 훌륭한 가문과 함께 토스카니에 179,221플로린의 재산을 남겨주었으며 이 돈을 달러로 환산하면 448만 525달러에 해당한다.
이때 코시모의 나이 39살로 충분히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코시모는 농장 그리고 실크와 방모사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상속받아 실크와 방모사 제품을 러시아, 스페인, 스코틀랜드, 시리아 등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에 수출했으며 터키인이 제조한 제품들을 수입해다 팔았다.
그는 동양에서 양념, 알몬드, 설탕 등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코시모는 사업에 전념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10인 전쟁위원회Dieci(War Council of Ten)의 멤버가 되었고, 피렌체가 루카Lucca로부터 전쟁에 승리하는 데 일조했으며, 전쟁 기간중 거액을 정부에 빌려줬다.
코시모의 영향력 하에서 시민계급 일부가 적극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정부 권력의 주축을 형성해 최소한 시민계급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변동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악용되었으며, 투표함은 조작되었고 관리들은 매수되거나 공갈 협박을 받아 행정장관들은 로보트와도 같았다.
피렌체의 정체는 문벌회사의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되는 비공식적 독재정치 체제였다.
이 가문의 우두머리는 외부적으로는 일개 시민으로 자처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형식뿐인 공화국 정치체제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코시모는 인기 있는 사업가이면서 정치인이었지만 그를 시기한 정적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리날도 데글리 알비지가 1433년 코시모를 몰아내고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었다. 리날도는 행정장관 베르나르도 구아다그니에게 코시모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베르나르도는 코시모를 베키오 궁정에 구금시켰다.
시그노리를 장악한 리날도가 코시모를 사형에 처할 것이 분명했지만 코시모는 베르나르도를 1천 두카트(약 2천5백 달러)에 매수해 아들과 심복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그곳에는 그를 반기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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