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이야기
14세기 말 이탈리아의 최강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11세기 초에 이미 베네치아 상선이 아드리아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바다 위에 떠 있는 이 도시를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융단, 향료, 단자緞子, 노예 등 동방으로부터 상품이 매일 항구에 유입되었고, 그것들과 교체해 양모제품, 직물들이 배에 적재되었다.
선주의 지혜, 선장의 담력, 외교관의 수완이 조화를 이루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의 시장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각지에 무역진흥공관을 세웠다.
무역진흥공관은 한 건물이 아니라 은행, 상점, 여관, 교회 등이 연립하는 한 시가의 총칭으로 면세, 치외법권 등 갖가지 특권을 누렸으며 현지 정부도 베네치아 상인들의 집단거주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무역진흥공관의 최고 책임자는 본국 총독이 임명한 관장으로 영사의 업무뿐 아니라 사법권을 행사하며 베네치아인들의 생사 여탈권도 갖고 있었다.
이 전선 기지가 본국에 번영을 가져오게 했으며 베네치아 경제 약진의 초석을 쌓았다.
이와 같은 번영의 우위는 본국의 견고한 정치체제에 의해 가능했으며 지속되었다.
베네치아의 최고 수반은 총독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귀족계급의 과두체제였다.
12세기 중엽 이후 35명으로 구성된 대평의회가 총독을 보좌했고 그 외에 6명의 현인으로 소위원회가 있었다.
대평의회는 입법뿐 아니라 정치 군사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총독을 선임 또는 해임할 수 있었으므로 총독은 현인의 보좌 하에 법안을 비준할 뿐,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신처럼 숭배받았다.
총독은 "지극히 귀한 군주"로 불리었으며 베네치아 총대사교와 상 마르코 대성당 참사를 총독이 지명했다.
총독의 궁전은 금과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견직물과 융단을 깔았으며 호화찬란한 점에서 비잔틴 궁전을 능가했다.
총독이 외출할 때면 북과 종을 울려 모든 시민에게 알렸다.
악대의 고수, 기수, 고위 관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호사한 의상을 입은 총독이 탄 금사와 비단으로 덮인 수레가 나타난다.
대평의회 회원들이 총독의 뒤를 따르고 고관, 현인, 외국 사절, 대성당 참사들도 행렬에 참가했다.
베네치아의 원로원
7세기로 거슬러올라가면 베네치아와 주변 섬들의 주민들은 일치단결하며 민주주의적으로 자치하며 살았다.
그후 자치권이 민중에게서 사라졌지만 총독의 외출에 대한 의식은 소박한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었다.
동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직후 총독은 민중 집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계급분화가 생기면서 정책 결정권이 일부 부유층 시민의 손에 넘겨졌고 민주주의는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다.
베네치아는 13세기 말에 과두지배의 색채를 강화해갔지만 여전히 법률상으로는 모든 시민이 대평의회에 선출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부유한 200~300명 가족의 은행가, 선주, 대상인이 의석을 독점하고 금권 귀족제로 만들어버렸다.
이 도시에서는 혈통의 귀족보다는 금전의 귀족이 판을 쳤다.
이러한 독점은 소외된 시민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으므로 이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297년 총독은 의원에 대한 자격을 규정하는 법안을 평의회에 제출했는데, 여태까지 선거로 공직에 취임한 자와 그의 자손의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대평의회가 이 법안을 가결한 후 유자격자의 이름을 정부에 써 보냈다.
1319년에 의원 정수를 대폭 증원하는 한편 매년 행하던 개선제도를 폐지했다.
그 결과 대평의회는 규모가 커져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그 기능의 대부분을 정부기관에 위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과두지배가 한층 강화되었다.
원로원이 생긴 것은 13세기 중엽으로 처음에는 사무적 기능에 불과했다.
그것이 14세기에 들어오면서 대평의회의 위탁을 받아 정치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원의 권한은 확대되어 항해, 통상, 국방에 관한 모든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이 외에 파견하는 대사의 임명권까지 맡게 되었다.
원로원의 중요한 임무는 외교로서 화전의 결정, 조약이나 동맹 체결, 대사에 대한 훈령 모두 원로원의 권한에 속했으며, 대사에게는 매주 원로원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첩보원의 메모는 원로원에서 낭독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보고 기록들을 보면 당시 유럽 제국의 궁정의 상황을 세밀히 묘사했으므로 베네치아와 이들 제국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여하튼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권이 원로원에 집중되었다.